독립의 선봉에서 국군의 토대가 된 시간들
창설 85년 국권수호 역사 이어온 시간들
오늘(17일)은 1940년 9월 17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지 85년이 되는 날이다. 광복군은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친 대한독립의 주역이자, 대한제국군-의병-독립군의 정신을 잇는 국권 수호의 숭고한 주인공이다. 광복군 창설 85주년을 맞아 그 희생·헌신의 시간과 활약을 조명한다. 서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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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등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합정부를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공포했다. 임시헌법 15조에서는 국민에 대한 병역 의무를 적시해 군사조직 방향을 제시했다. 같은 달 17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을 통해 독립운동의 최후수단이 전쟁임을 선언하고 지속적으로 이를 준비해 나갈 것을 천명했다. 이어 11월 5일 대한민국임시관제, 12월 18일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 등을 정해 군사제도를 구체화했다.
그러나 임시정부 활동은 출범 직후부터 위기를 맞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타격을 입은 일본군이 1920년 경신참변을 일으켜 독립군 기지를 초토화한 데다 1921년에는 독립군들이 자유시참변으로 상당수 군력을 상실해 독립전쟁의 근간이 무너졌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는 여러 지역에 흩어진 독립군 단체를 규합하고자 노력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이봉창·윤봉길 의거가 성공하자 임시정부는 중국 당국과 협의해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 설치를 추진했다. 1933~1936년 250여 명의 한인이 이곳을 졸업했고, 한국광복군 요원이 됐다. 또한 임시정부는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조직해 독립전쟁을 전개하면서 임시정부 국군 창설 준비를 계속했다.
1937년 7월 임시정부는 군무부 산하에 군사위원회를 발족했고, 1939년 11월에는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독립운동방략을 발표했다. 이어 1940년 8월 광복군 총사령부를 조직하고 9월 15일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했다. 선언문은 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 명의로 이뤄졌다. 창설기념식인 성립전례식은 이틀 뒤인 17일 충칭 가릉빈관에서 거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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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설 광복군은 1940년 10월 9일 공포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조직 조례에 근거해 조직체계를 확립했다. 조직은 통수부와 총사령부를 상부 조직으로 하고, 1·2·3·5지대를 편성했다. 처음 1~3지대를 만들었고, 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1941년 1월 5지대로 편입했다. 광복군 총사령은 이청천(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지대별로 보면 1지대는 1942년 7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으로 개편되며 시작했다. 조선의용대는 창설 직후부터 중국 전선에 파견돼 중국군의 대일항전에 참여했다. 이후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일부 대원이 한인 거주지역으로 진출했고, 이들을 제외한 잔류대원과 일선 공작원을 1지대로 편성했다. 지대장은 김원봉이 임명됐다. 충칭 호북성 노하구와 절강성 금화에 각기 구대를 두고 활동했다.
2지대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해 1지대가 됨에 따라 종전 지대 개편과 함께 창설됐다.
이범석을 지대장으로 대원 30여 명이 지대를 구성했다. 2지대는 화북지역 한인을 대상으로 초모 활동(조직이 필요한 인원을 적극적으로 모으는 활동)을 벌여 병력을 증강해 나갔다. 대원들은 군사특파단과 전지공작대에서의 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을 활용했다. 대원들은 중국어와 일본어가 가능했고, 일부는 영어도 구사했다. 이런 능력은 미 전략첩보국(OSS) 훈련을 하는 중요한 바탕이 됐다.
3지대는 한국광복군 창설 때 1·2지대와 달리 대원들이 있지 않았다. 이에 1942년 4월 징모처 6분처라는 이름으로 푸양에서 병력 확보를 위한 초모 활동을 전개했다. 푸양은 일본군 점령지역 및 중국군 10분교 주둔지와 가까웠다. 6분처는 푸양을 중심으로 서주, 귀덕, 난징 등지에서 초모활동을 벌였다.
광복군은 1943년 중반 이후 미국, 영국 등 연합군과 합작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주로 초모 활동, 교육훈련, 선전 활동을 펼쳤다. 대원들은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으로 구분해 교육훈련을 했다. 초모활동·교육훈련·선전활동은 광복군의 편성, 양성, 확장과 독립전쟁 수행을 위한 기본적인 준비였다. 주목할 점은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과의 합작 군사 활동이다. 인면전구공작대와 국내 진입작전이 바로 그것. 1943년 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인도·버마 전선에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해 영국군과 함께 일본군을 상대했다. 대원들은 선무공작, 후방지역 교란, 문서 번역 등을 했다.
국내진입작전(독수리작전)은 1945년에 있었다. 그해 8월 4일 광복군과 OSS의 1기 첩보훈련과정이 완료되면서 광복군 정예대원을 선발해 한국 내로 진공하려는 계획인 국내 진입작전이 구상·전개됐다. 이어 7일 시안에서 한미 간 작전회의가 열렸다. 김구 주석,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 이범석 지대장이 참석했다. 미국에서는 OSS 책임자 도노반 소장, 첩보책임자 헬리웰 대령 등이 함께했다. 이들은 한반도 침투 시기를 논의했다. 10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OSS는 훈련을 마친 광복군 대원들을 즉시 이동시키기로 하고, 22명의 정진대를 16일 출발토록 했다. 그러나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작전은 무산됐다.
광복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노력이 모여 일궈낸 승리의 역사다. 또한 광복군은 우리의 힘으로 조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자주적 의지의 발현이었다. 광복군은 광복 이후에도 국군 창설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요 인물은 국군의 토대를 마련하는 데도 앞장섰다. 국군은 대한제국군에서 의병,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국권수호의 역사적 연속성과 정통성을 갖는 군대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광복군 창설 85주년은 독립전쟁을 펼쳐낸 광복군의 숭고한 정신을 계승하고 우리 국군의 뿌리를 기억하는 날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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