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상처를 어루만질 용기

입력 2025. 09. 16   16:10
업데이트 2025. 09. 16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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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르 마스크’ 

제1차 세계대전 얼굴 다친 군인 위한
파리의 가면 제작 스튜디오 배경으로
상처 딛고 나아가는 이야기 그려
불완전할지라도 버티고 살아가는 힘 
관객에게 진심 담긴 용기·위로 전해


살아가면서, 살아갈수록 상처는 늘어난다. 생채기가 하나둘 쌓이고 상처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지면 우리는 그것을 가면으로 가리고 살아간다. 뮤지컬 ‘르 마스크’는 가면을 부끄러움의 표식이 아니라 다시 살아가게 하는 힘으로 바라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비극을 배경으로 동화처럼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뮤지컬 ‘르 마스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실존했던 ‘초상가면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상처를 마주하고 위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뮤지컬 ‘르 마스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실존했던 ‘초상가면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상처를 마주하고 위로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

 


제1차 세계대전 말 파리, 실존했던 ‘초상가면 스튜디오’가 이 작품의 무대다. 다리가 불편해 늘 허드렛일만 맡아온 레오니, 전장에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고 삶의 의지를 잃은 귀족 청년 프레데릭, 묵묵히 스튜디오를 돕는 잡화점 청년 페르낭, 그리고 미국에서 날아와 가면 스튜디오를 연 마담 레드. 네 사람은 서로의 상처를 마주하거나 곁눈질해 가며 이야기의 온기를 채워간다. 

잔심부름꾼으로 들어왔지만 손재주가 좋아 가면 제작 기회를 얻은 레오니는 완벽한 가면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의 첫 고객 프레데릭은 삶을 포기한 듯한 인물로, 완강하게 가면을 거부한다. 두 사람의 관계는 넘버 ‘편하게 말해봐요’ 장면에서 전환점을 맞는다. 레오니는 붕대를 푸는 것을 거부하는 그에게 강요 대신 질문을 건넨다. 이름은 무엇인지, 고향은 어디인지, 좋아하는 책은 어떤 건지. 질문은 쌓여 대화가 되고, 프레데릭은 비로소 숨겨왔던 맨얼굴을 내보인다.

이 장면은 후반부에 거울처럼 되비친다. 후원자들의 모금액이 줄어들면서 스튜디오가 문을 닫게 되고, 절망에 빠진 레오니에게 이번에는 프레데릭이 같은 질문을 돌려준다. “편하게 말해보라면서”라며 시작되는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은 서로의 상처 위에 조심스럽게 희망을 덧그려 간다. 상처를 경험해 본 이들만이 진정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맑은 물속에 담근 손처럼 선명하다.

 

 

뮤지컬 ‘르 마스크’의 한 장면. 사진=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르 마스크’의 한 장면. 사진=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르 마스크’의 한 장면. 사진=이모셔널씨어터
뮤지컬 ‘르 마스크’의 한 장면. 사진=이모셔널씨어터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레오니는 프레데릭을 위한 완벽한 가면을 만들고 싶다는 집념 끝에 그의 약혼녀 르네에게 몰래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이 선택은 오히려 프레데릭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남기고 만다. 자신의 고통을 감당하기도 벅찬 프레데릭으로서는 그 누구보다 감추고 싶었던 인물에게 상처를 드러내야 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봉쥬르’는 이 작품의 시작과 끝을 감싸는 넘버다. 처음에는 평화로운 인사로 노래되지만, 포성과 함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며 전쟁의 어두운 현실을 드러낸다. 그러나 마지막에 다시 불리는 ‘봉쥬르’는 서로를 지켜낸 이들이 내일을 약속하는 인사로 변주된다.

또 다른 넘버 ‘절름발이 레오니’도 좋다. 주인공이 자신에게 찍힌 낙인을 스스로 입에 올리며 당당히 주체로 서는 순간이 담겨 있다. 이어지는 ‘살아있어’와 ‘내 세상을 살아가는 길’은 작품 후반의 정서를 지탱한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다짐이 음악에 실려 객석으로 날아온다.

이지수를 대학로 소극장(et 씨어터)에서 본 것은 처음이다. ‘젠틀맨스 가이드’ ‘레베카’ ‘그레이트 코멧’ ‘레 미제라블’ 등 대극장 무대에서만 보던 배우를 소극장에서 만나는 경험은 늘 각별하다. 손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보니 확실히 표정의 작은 움직임, 연기적 호흡이 오롯이 전해져 온다. ‘이지수가 이런 배우구나’ 싶다. 밝고 씩씩하게 프레데릭을 빛으로 이끄는 연기가 참 좋다.

이지수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에는 러브라인이 없어서 더 좋았다”고 말했다. 관계의 무게를 사랑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의 위로에 집중하고 싶었을 것이다.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노래와 연기 속에 공깃밥처럼 꾹꾹 눌러 담았다.

프레데릭을 연기한 임진섭은 가면으로 잘생긴 얼굴을 가려놓아 조금 아쉽긴 했지만, 오히려 제약 속에서 더 섬세하게 인물의 내면을 드러냈다. 천성적으로 마음이 여리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기에 좌절의 무게가 더 커져 버린 청년 귀족의 모습을 기품 있게 표현했다. 박근식의 ‘페르낭’은 어딘지 짠한 캐릭터다. 그의 사랑과 배려가 비록 레오니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닿지는 못했지만, 그의 순박한 진심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김지민은 경험이 풍부한 배우다. 기량이 탄탄하고, 작품 안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의 무게를 정확히 알고 움직인다. 마담 레드는 그저 단순히 마음 따뜻한 조력자가 아니라 예술과 현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이 작품에서 어쩌면 가장 중립적인 인물일 것이다. 스튜디오를 닫고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그의 결심은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기도 하다.

상처를 가면으로 가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러운 것은 상처가 없는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살아가는 일이다. 상처 입은 자가 상처를 감춘 채 다른 사람의 상처를 비웃는 태도야말로 부끄러운 일이다. ‘르 마스크’에서 가면은 단순한 은폐가 아니라 삶을 버티는 간절한 힘이다.

무대 위 네 사람은 끝내 완전한 회복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더 이상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됐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내일을 살아가려 한다. 이 불완전한 용기야말로 ‘르 마스크’가 관객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한 봉쥬르일 것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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