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를 만나다
윤봉길 의거 후 체포돼 국내로 압송
사회주의자 이탈로 ‘유일독립당’ 무산
민족주의 28인 모여 ‘한국독립당’ 창립
김구, 윤봉길 의거 전 도산에 피신 전갈
길 어긋나 쪽지 못 받고 일 경찰에 잡혀
재판정서 당당히 “독립운동 계속할 것”
4년 징역형 선고…서대문형무소 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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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방문과 한국독립당 창당
도산은 ‘유일독립당’ 운동을 추진하면서도 모범촌 건설 후보지와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있었다. 때마침 필리핀 거주 한인의 초청으로 도산은 동서이며 의사인 김창세와 함께 1929년 2월 9일부터 3월 말까지 필리핀의 여러 섬과 파인즈마을을 답사하기도 했다.
도산은 4월 초 난징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 이탁·손정도 등 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해 ‘한·중 동맹군’ 조직을 제안했다. 국민당 정부에서도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실무를 추진하던 이탁과 손정도가 갑자기 사망하고, 이어 1931년 7월 발생한 소위 ‘만보산 사건’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중국 지린성 장춘시 만보산 지역에서 한·중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발생한 작은 충돌이 민족 대립으로 확대됐고, 그 배후에는 만주 침략을 앞둔 일제의 음모가 있었다.
한편 기대했던 ‘유일독립당’ 결성이 사회주의자의 이탈로 실패하자 도산은 1929년 말 민족주의자들만으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기로 했다.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28인은 1930년 1월 25일 이동녕을 이사장으로 하고, 안창호·김구·조완구·김철·조소앙·이시영을 이사로 해 ‘한국독립당’을 창립했다. 도산의 목적은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만이라도 대공주의(大公主義) 정신으로 단결해 임시정부를 확고하게 지원하는 데 있었다. 아울러 ‘상해한인청년당’ ‘상해한인애국부인회’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상해한인소년동맹’ 등을 자매단체로 조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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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봉길 의거와 도산 체포
1931년 9월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은 이듬해 1월에는 상하이를 점령하고, 1932년 4월 29일 ‘천장절(일왕 생일)’을 맞아 한국·만주·상하이 등지에서 대대적인 승전 축하 행사를 했다. 윤봉길 의사는 이날 훙커우공원(루쉰공원)에서 열리는 경축식장에서 침략의 앞잡이들을 응징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다. 총사령관 시라카와 대장과 행정위원장 가와바타는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을 비롯한 5명의 요인이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은 현장에서 체포돼 그해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세계의 눈이 집중된 상하이에서의 윤봉길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했고,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만방에 과시했으며, 임시정부 또한 독립운동의 전열을 가다듬는 계기가 됐다. 중국군 사령관 장제스(장개석)는 “중국군 30만 명이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 한 사람이 해냈다”고 평가했고,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 광복군 양성을 적극 후원하는 계기가 됐다.
한편 거사 당일 도산은 상하이 거류민단 단장 이유필의 장남이며 소년동맹 회장인 이만영과 약속한 체육대회 기부금을 전해주기 위해 프랑스 조계 안에 있는 이유필의 집을 방문했다. 극비리에 거사를 추진한 김구는 이날 아침 도산에게 인편으로 ‘오늘 큰일이 일어날 것 같으니 10시 이후에는 댁에 있지 말고 피신하라’는 쪽지를 보냈다.
도산은 흥사단원 조상섭의 집에 들렀다가 골목길을 택했으므로 길이 어긋나 쪽지를 받지 못한 채 이유필의 집에 도착했다. 곧이어 이유필을 체포하려 들이닥친 일본 형사와 프랑스 경찰에게 도산이 체포되고 말았다.
즉시 차리석(車利錫)이 중심이 돼 ‘도산선생구제위원회’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하이 한인거류민단, 흥사단 등이 협력해 다각적으로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프랑스 조계 경찰은 1932년 3월 1일 도산을 일본 헌병대에 넘겼다. 이때까지 프랑스 조계 안에서는 정치적 망명객이 보호받을 수 있었으나 윤봉길 의거가 워낙 큰 사건이고, 상하이 전역이 일제 점령하에 들어갔으므로 프랑스 경찰도 일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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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몸으로 귀국 수감
도산은 일본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윤봉길 사건과 관련 혐의가 없음에도 6월 2일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케이안마루호를 타고 칭다오를 거쳐 6월 7일 인천항으로 압송돼 경기도 경찰부에 갇혔다. 망국의 한을 안고 ‘거국가’를 남기고 조국을 떠난 지 22년 만에 구속된 몸으로 귀국한 것이다.
일제 특별고등경찰은 악명 높은 미와 형사를 시켜 도산을 신문하고 회유했다. 일제의 1차적 목적은 도산을 변절시켜 친일 인사로 만드는 것이었다. 장시간 신문해도 소득이 없자 미와는 윤치호를 만나게 했다. 도산은 한때 존경했던 선각자 윤치호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예전의 영민함과 기개는 사라지고 한민족의 장래에 낙담한 패배주의 변절자의 모습을 보고 슬펐다(신용하, 『도산 안창호 평전』).
1932년 7월 15일 도산은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됐고, 이후 15일 동안 또다시 신문을 받았다. 마지막 신문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할 생각인가’를 묻는 총독부 판사 질문에 도산은 “앞으로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있는 힘을 다해 운동할 생각”이라고 당당하게 답했다.
도산은 검사국에 있는 동안 지병인 위장병으로 소화불량에 시달렸고, 이도 빠져 동지들의 도움으로 틀니를 끼워 겨우 음식을 먹었다.
도산은 12월 19일 검사의 구형대로 4년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열악한 시설에 잡범들과 같은 방을 쓰게 돼 고통스러웠으나 다른 수감자들을 통해 일제에 수탈당하고 억압받는 한국 사회의 실상을 자세히 알게 됐다.
일제는 일반 수감자가 독립운동가들을 만나며 독립사상을 갖게 될 것을 우려해 대전형무소를 신축하고, 1933년 3월 28일 도산을 대전형무소로 이감했다.
도산은 처음에 독방에 갇혔으나, 출감 후의 활동에 대비해 건강 회복에 힘쓰며 가족에게 편지를 쓰거나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도산은 1년을 감형받아 1935년 2월 10일 가석방됐다. 그러나 거주지는 평양 부근으로 제한됐다.
사진=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수난의 민족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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