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창간의 순간을 돌아보다
“제발 잘 나와 다오”
긴장감·떨림·설렘·기대감 안고
국방일보의 전신 ‘전우’ 탄생
서울신문 한구석 편집실 마련해
10명 인력으로 창간팀 꾸려
대판 4개면 2만5000부 첫 발행
“1964년 11월 16일 오후 3시 ‘정말, 이대로 돌려도 되는 것인가? 제1면은… 제2면은… 제3면은… 제4면은…? 제발 잘 나와 다오’. 윤전기 작동 버튼을 누르니 ‘쿠릉’ 하는 소리와 함께 기계가 세차게 돌기 시작했다. 신문이 쏟아져 나와 쌓였다. 코끝에 잉크 냄새가 물씬하면서 제1면 윗머리에 ‘전우(戰友)’라는 두 글자가 선명히 보였다. 뭐라 말할 수 없는 싱그러운 인상이었다. 창간호가 드디어 태어난 것이다.”(『국방일보 40년사』 발췌)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국방일보의 전신 ‘전우’ 제1호, 창간호가 탄생한 순간이다. 당시 긴장감과 떨림, 설렘, 기대, 걱정 등 그날의 단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시설 준비부터 인력 구성, 인쇄 계약까지 열악한 환경에서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치며 어렵사리 발행된 ‘전우’. 국방일보 창간 60주년을 맞아 본지의 근원 ‘전우’의 탄생 과정과 주요 내용을 살펴보며 국방일보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 본다. 김민정 기자/사진=국방일보 DB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전우’
6·25전쟁 이후 각 군에서는 주간 및 월간지 형태의 다양한 진중발간물을 발행해 왔다. 그러나 국가안보의 중요성과 국군의 위상을 알리기 위해 하나의 통일된 목소리를 내는 군사전문지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는 계속돼 왔다.
이 논의가 1964년 급물살을 타게 된다. 국민 안보의식 고취와 장병 정신무장 강화의 필요성이 더해지며 ‘국가안보의 중추인 국군이 일간신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당위성이 자연스럽게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국방부는 1964년 국군의 날인 10월 1일에 맞춰 새로운 국군 일간신문 창간을 준비했다. 당시 김성은 국방부 장관 지시로 국방부 정훈국 정훈과가 발간계획을 수립했다. 초창기 신문 제작인력은 이영치(정훈 1기·육사 8기) 편집실장 등 단 10명. 정훈 분야 근무 경험이 있거나 전역 이후 신문·잡지에서 근무 경험이 있는 이들로 창간팀이 꾸려졌다. 우여곡절 끝에 인력은 구성했으나 신문 이름인 제호 선정부터 제작시설 구축, 인쇄·배송문제 해결 등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국군의 날에 창간한다는 계획은 연기가 불가피했다.
먼저 제호는 국군 장병을 위하는 진중신문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해 ‘국방일보’ ‘국방신문’ ‘호국신문’ ‘방패’ ‘전우’ ‘정훈보’ 등 여러 의견이 제기됐다. 그러나 장병들의 단결력과 전우애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주 독자층인 장병과의 관계를 밀접하게 나타낼 수 있는 ‘전우’가 최종적으로 선택됐다. 인쇄를 서울신문에서 맡아 주기로 하면서 자연스레 서울신문 4층 한구석에 편집실을 마련했다. 11월 16일 창간호가 나오기 불과 6일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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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안보·정신전력·교양 콘텐츠 담아
창간호는 총 4개 면으로 구성됐다. ‘전우’는 국방부 정책에 따라 일간 대판 2면으로 결정됐으나 창간호는 특집으로 대판 4면을 제작했다. 창간계획상 6만 부를 찍기로 했으나 실제 창간호는 2만5000부가 발행됐다.
1면에는 ‘전우’의 발간 의도를 전파하기 위해 ‘창간사’와 함께 최전방 고지 위에서 휘날리는 태극기를 촬영한 사진을 게재했다. ‘전우’가 군사신문임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 전선 장병들의 대적 경계를 주제로 노산 이은상 시인에게 의뢰한 창간 축시 ‘피어린 육백리’도 1면에 함께 게재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戰友愛(전우애)’라는 친필 휘호를 보내 창간을 축하했다.
2면에는 한국군의 베트남 해외파병과 관련해 종군기자·군 관계자들의 ‘특별좌담회’를 실어 한국군의 파병과 그 의의를 장병들에게 전파했다.
3면은 사회 면의 성격을 보여 줬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양준명·정봉임 두 귀순자의 탈북기를 톱기사에 배치했다. 그다음엔 휴전선에서 무장간첩을 생포(1명)·사살(1명)한 육군15보병사단의 전공기를 게재했다. 하단엔 현재까지 이어지는 ‘조명탄’이라는 칼럼을 배치했고 장병들의 대적관을 고취하는 ‘방첩과 반공대책’이라는 제목의 연재물도 실었다.
4면은 정보 제공뿐만 아니라 주로 교양·인문학적 소양을 키울 수 있는 콘텐츠로 구성됐다. ‘동상 예방에 대하여’(보건), ‘명작살롱’(문예), ‘명장언행록’(교훈) 등 연재물과 정비석 씨가 집필하는 연재소설 ‘현처’ 등이 실렸다. 당시 최고 인기 소설가였던 정비석 씨는 기존 대비 5분의 1 수준인 원고료를 받으면서 집필했다고 한다. 고바우 김성환 화백의 연재만화, 이은상 시인의 창간 축시 등 새로운 일간 군사전문지 탄생에 각계각층의 관심과 기대를 보여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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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24개면… 국군·국민과 직접 소통
탄생 60주년을 맞은 현재 국방일보는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을 거듭하며 ‘국내 유일의 국방안보 전문 일간지’로 성장했다. 단 2개 면으로 시작한 신문은 현재 24개 면으로 확대됐고, 발행부수도 11만5000부(장병 10만 부, 일반 1만5000부)로 일간지 중 상위권에 속한다. 국방정책, 군사소식뿐만 아니라 경제·사회·문화 등 장병들의 지적 안목을 높이고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문예코너 ‘오피니언’과 ‘병영의 창’을 통해 장병·국민과 직접 소통하며 접점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기국간 국방일보부장은 “국방일보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도 신문의 가치를 인정받고, 장병과 국민의 신뢰를 얻으며 성장해 왔다”며 “장병뿐만 아니라 예비역, 퇴역, 병역명문가, 일반국민 등 독자층을 다양화해 더 많은 사람이 국방일보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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