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눈물로 가슴에 묻었다

입력 2024. 06. 19   17:03
업데이트 2024. 06. 1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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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사자 발굴유해 합동 안장식

유골함 앞에 선 구순의 동생
“얼마 있지 않으면 돌아간다”
편지 남긴 고 오용순 일병
한 줌의 재로 가족 품에…

국유단 끈질긴 노력 ‘성과’
발굴 유해 7위 넋 기려
가족들 “오래 지났어도
잊지 않고 찾아주셔서 감사”

 

19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6·25전쟁 전사자 합동안장식에서 고 오용순 일병의 동생 오용이 씨가 오빠의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19일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6·25전쟁 전사자 합동안장식에서 고 오용순 일병의 동생 오용이 씨가 오빠의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우리 오빠가 이제 왔네.”

어느덧 주름이 가득해진 ‘구순의 동생’이 70여 년 전 전쟁에 나갔던 오빠의 유골함을 어루만지며 대성통곡했다. 6·25전쟁 전사자인 고(故) 오용순 일병의 동생 오용이(90) 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육군은 19일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6·25전쟁 전사자 발굴 유해 7위의 합동안장식을 엄수했다.

국립현충원에서는 6·25전쟁 전사자인 오 일병의 마지막 가는 길을 추모하는 합동안장식이 열렸다. 이날 합동안장식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주관으로 유가족과 국방부 및 보훈단체 관계자, 장병 등 24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고인은 다섯 명의 동생을 살뜰히 돌보던 첫째 오빠였다. 그는 1931년 10월 전라북도 남원시에서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북 무주에서 마을 청년단장으로 활동하며 청년들에게 목총사격 훈련을 지도했다. 이후 군사교육을 받으라는 청년단본부의 통보를 받아 대구로 이동한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8사단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 일병은 ‘영천지구 전투’ ‘의성지구 전투’에 참전해 평안남도 영원군으로 북진해 ‘영원-맹산 전투’에도 참가했다.

그가 북진 중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얼마 있지 않으면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고 통일 되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1951년 2월 12일 횡성전투에서 대규모의 중공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향년 20세, 꽃다운 나이였다.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된 여동생 오씨는 한 줌의 재가 돼 가족의 품에 안기게 된 오빠의 영정사진을 끌어안으며 주저앉았다. 이를 지켜보던 참석자들은 유가족을 부축하며 한없이 부족한 위로를 건네 뭉클함을 자아냈다. 

 

 

고인에게 경례하는 참석자들.
고인에게 경례하는 참석자들.



오 일병은 유전자 정보 재분석 등 국유단의 끈질긴 노력 끝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씨는 “전쟁 발발 다음 해에 받은 마지막 편지 이후로 소식이 끊긴 지 70년 만에 오빠의 유해라도 만날 수 있다니 감회가 새롭다”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국가가 잊지 않고 찾아준 노력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대전현충원에서는 고현석(중장) 육군참모차장 주관으로 고 김종기·김동수 이등중사, 김희정 중위, 차말줄·김희선·류홍석 일병 등 6위에 대한 합동안장식이 거행됐다.

고인들의 유해는 2000년부터 2002년 사이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전후방 각지에서 발굴됐으며, 유가족 시료 채취로 얻은 DNA 정보를 통해 국유단에서 최종적으로 신원을 확인했다.

박 총장은 조사에서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위해 기꺼이 헌신하신 호국영웅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자유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선진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며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확고한 대적관으로 무장하고, 북한이 감히 다시는 도발하지 못하도록 유사시 압도적인 힘으로 단호하게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글=조수연/사진=양동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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