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 ‘~스러움’ 둘

입력 2024. 05. 09   16:16
업데이트 2024. 05. 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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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서 골목 속으로 ⑧ 역사가 숨 쉬는 골목, 경주 황리단길 

‘고급+예스러움’ 1000살 젊은 경주를 걷다
한옥의 처마
봉골레파스타·모차렐라 십원빵
고전美와 세련美 황금비율로 공존
전국에서 가장 장사 잘되는 ‘~리단길’
오래 걸을수록 사랑스러워~~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와 자웅을 겨루던 신라는 당나라와 힘을 합쳐 두 나라를 물리친다. 경주는 세 나라가 합쳐진 통일신라시대까지 수도의 위상을 굳건히 유지한다. 992년. 거의 1000년이란 시간 동안 가장 번화한 수도로 명성을 떨쳤다. 지금은 서울이나 부산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1000년 고도 경북 경주의 황리단길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면서 여행자로 넘쳐난다.
외국인들이 생각하는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 황리단길을 수놓는다. 예전에 경주를 방문했던 사람들이라도 요즘의 경주에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새로운 가게와 음식을 계속 선보이기 때문이다. 옛 모습을 담되 끊임없이 새로워지려는 역동성이 경주의 장점 아닐까? 1000세의 도시인데도 여전히 젊다. 여든 노인부터 다섯 살 아이까지 빠져들게 하는 신비롭고 떠들썩한 도시, 바로 경주다.


1980년대 수학여행의 성지

1980년대 서울의 고등학생들은 대부분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다. 수학여행은 그 시절 가장 설레는 행사였다. 교과서로만 접했던 불국사나 석굴암을 실물로 본다는 것만으로도 밤잠을 설쳐야 했다. “에계계? 왜 이렇게 작아?” 첫인상은 실망스러웠다. 화장기 없는 연예인의 맨얼굴을 본 기분이랄까? 기대보다 크기가 너무 작았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라면 훨씬 더 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른이 돼 다시 찾아간 경주도 역시나 지루했다. 여기저기 산재한 문화재만으로는 100점짜리 여행지가 될 수 없다. 잠자리·먹거리 등이 합쳐져야 비로소 균형 잡힌 여행지가 된다. 박물관이나 유적지를 방문하고 나면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또 20년이 흘렀다. 이제는 평일이건 주말이건, 밤이건 낮이건 여행자들로 빼곡한 별천지가 됐다. 우울하고 지루한 경주는 과거시제다. 경주월드의 놀이기구는 스릴을 찾는 MZ세대에겐 롯데월드 이상으로 여겨진다. 그들의 비명이 1000년 고도 경주와 묘하게 어울린다.


 

한옥의 아름다움 간직한 황리단길.
한옥의 아름다움 간직한 황리단길.



새로운 콘텐츠로 MZ세대를 사로잡다

지금 전국에서 가장 핫한 골목을 딱 둘만 꼽으라면 서울 종로의 익선동과 경주의 황리단길이 아닐까? 두 곳 다 한옥의 세련됨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처마와 나무문을 보면 분명 한옥이 맞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면 바리스타가 커피를 추출하고, 봉골레파스타가 예쁜 접시에 담겨 나온다. 태국이나 베트남 음식을 팔기도 한다.

신라시대 또는 조선시대 복장을 한 외국인들이 여기저기서 ‘인생샷’을 찍는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지만, 외국인들에겐 거대한 사진스튜디오다. ‘십원빵’은 새로운 경주의 상징이다. 10원 동전을 형상화해 빵을 만들었다. 쌀과 밀가루로 반죽한 빵 안에는 모차렐라치즈가 가득하다. 맛만 생각하면 딱히 특이할 것도 없다. 하지만 동전 모양의 큼직한 빵은 일단 재밌다. 가격도 3500원(10원 아니다)이니 입에 안 맞는다고 해도 크게 억울한 것도 없다.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새로운 콘텐츠를 끊임없이 개발한다. 쫄깃쫄깃 매콤한 쫀드기라든지, 컵에 담아 파는 육회물회도 황리단길의 인기 상품. 황리단길은 도대체 심심할 틈이 없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골목 

황리단길은 내남사거리에서 황남초등학교 사거리까지의 황남동과 사정동 일대를 일컫는다. 황리단의 명칭은 서울 ‘경리단길’에서 유래됐다. 젊고 핫한 거리들이 앞다퉈 ‘~리단’을 붙이기 시작했다. 서울 송파구의 송리단길, 망원동의 망리단길이 대표적이다.

황리단길은 전국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리단길’일 것이다. 벚꽃이 피면 벚꽃을 보러, 단풍이 물들면 단풍을 보러 경주로 온다. 황리단길에서 먹고 마시고 잔다. 불국사 주변 읍천항과 소현리는 벽화로 유명하다. 이보다 알찬 여행지가 또 있을까 싶게 경주는 볼 곳도 갈 곳도 많다. 아니 많아졌다.

눈을 돌리면 천마총이, 또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면 첨성대가 환상적인 조명과 함께 야경을 책임진다. “교토보다 경주가 더 멋진데?” 한국에 경주가 있다면 일본엔 교토가 있다. 무려 1075년간 일본의 공식 수도였던 곳. 둘 다 각자의 매력으로 빛나는 곳이지만,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경주가 좀 더 재밌다.


물 위에 비친 경주 월정교의 야경.
물 위에 비친 경주 월정교의 야경.



무려 80m, 지금은 사라진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의 높이는 무려 80m. 지금으로 치면 아파트 30층 높이다.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한다면 말도 안 되게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안타깝게도 고려시대 몽골군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9층 목탑은 일본·말갈 등 신라를 괴롭힌 아홉 외적을 상징한다. 외적의 침입을 막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당시 경주의 한복판에 우뚝 세워진 것이다. 목재 건축은 자주 소실되고 재건된다. 언젠가 80m 높이의 거대한 나무탑이 화려하게 재건되기를 기대해 본다.

경주의 장점은 유적지를 복원시키는 데만 그치지 않고 주변의 공원·상가 등과의 조화를 중시한다는 것이다. 조잡하지 않고 우아하다. 낮보다 밤의 경주가 훨씬 아름다운데 동궁과 월지, 월정교를 잇는 길은 그야말로 꿈의 산책로다.

불교에 심취한, 하지만 늘 외적의 침입에 시달려야 했던 신라를 상상하면 지금의 이 평화로움이 새삼 더 감사하다. 전쟁의 화마에 휩싸여 혼비백산하던 그때의 소망은 평화였을 것이다. 아무런 위기감 없이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특혜다. 고급스러움과 예스러움이 황금비율로 섞여 있는 곳, 바로 경주 황리단길이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필자 박민우는 ‘25박 26일 치앙마이 불효자 투어’ ‘1만 시간 동안의 남미’ ‘지금이니까 인도, 지금이라서 훈자’ 등을 쓴 여행작가다. 방송을 통해 세계 각지의 삶과 문화를 전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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