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리, 침묵은 과연 미덕일까

입력 2024. 05. 07   15:58
업데이트 2024. 05. 07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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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민의 연구소(연예를 구독하소) - JTBC 수목드라마 ‘비밀은 없어’

‘완벽’ 강박에 시달리던 아나운서
직속 상사 부당함 맞서 직설 날리고
아이돌 촬영장 갑질에 일침 가해
속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로 공감
낮은 시청률에도 SNS서 화제
‘마음의 소리’ 샤우팅에 호응 보내

JTBC 수목드라마 ‘비밀은 없어’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배우 고경표와 강한나.
JTBC 수목드라마 ‘비밀은 없어’ 제작발표회에 참석한 배우 고경표와 강한나.



최근 문화계의 최대 이슈는 국내 최대 엔터테인먼트사 하이브와 자회사 어도어의 내홍이다.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으로 본격 점화된 현 문제는 그야말로 모든 이들의 입에 오르는 큰 관심사로 자리매김했다.

대중이 주목하는 포인트는 꽤 다양한 편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장장 2시간20분에 걸쳐 쏟아낸 필터가 없는 듯한 민 대표의 발언이다. 이는 현장의 취재진도, 유튜브를 통해 지켜보던 대중도 좀처럼 쉽게 경험한 적 없는 광경이었다. 여러모로 충격적이다.

우리는 종종 침묵을 강요받는다. ‘침묵은 금’ ‘침묵의 미덕’이라는 말을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으며 자랐다. 이로 인해 ‘해도 되는 말’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하는 자기 검열을 일상생활에서도 무수히 반복했던 터. 앞선 기자 회견장 발언의 실체가 해명일지, 폭로일지, 음해일지 그 시시비비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을 고스란히 입 밖으로 내뱉는 듯한 익숙지 않은 신묘한 행위에 호응하는 대중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공교롭게도 이런 시기에 스타트 라인을 밟은 JTBC 새 수목드라마 ‘비밀은 없어’는 ‘마음의 소리’를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 모두 다 말하게 된 아나운서의 이야기를 주요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극 중 방송사 간판 아나운서로 항상 반듯하고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던 송기백(고경표) 아나운서는 몇 가지 우연한 사건들이 겹치면서 말과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그는 직속 상사의 부당함에 맞서 직설하고, 인기 아이돌의 촬영장 갑질에도 참지 않고 일침을 가한다. 이는 근래 안방극장에서 호감과 호응을 격렬하게 끌어내는 속 시원한 ‘사이다 캐릭터’ 모습 그 자체다.

 

‘비밀은 없어’ 포스터. 사진=JTBC
‘비밀은 없어’ 포스터. 사진=JTBC



드라마 ‘비밀은 없어’는 방영 첫 주 1회 1.9%(닐슨코리아, 유료가구 기준), 2회 2%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물론 시청률 수치에 비해 온라인과 SNS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큰 화제성을 꿰찬 분위기. 이것이 ‘병맛 로코’에 기반한 드라마 제작진의 목적과 방향성에 걸맞은 예상된 호응인지, 아니면 장안의 화제가 된 ‘기자 회견’의 면면과 타이밍상 교묘하게 맞물려 예상 못한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것인지 확인할 방도는 없다. 중요한 것은 참지 않고 마음의 소리를 내뱉는 누군가에게 다수의 사람이 격한 공감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혀 거짓말을 할 수 없게 됐다’라는 설정은, 이미 영화 ‘정직한 후보’ 시리즈 등의 작품에서 코믹한 요소로 활용돼 대중에게도 낯이 익다. ‘정직한 후보’처럼 판타지에만 의존하지 않고, “뇌에 있는 병변이 마치 치매 증상처럼 감정 조절의 불균형과 성격 변화 등을 일으켜, 말과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됐다”라는 신경외과 전문의(권율)의 진단을 받는 형태로 우회했다는 차이는 존재하지만, 사실상 이는 크게 중요치 않다.

‘정직한 후보’에서 3선 국회의원 주상숙(라미란)이 거짓말을 못하게 돼 선거운동에 중요한 차질을 빚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밀은 없어’ 송기백 아나운서 역시 마음을 숨기지 못하게 되면서 뉴스 앵커로서의 업무와 사회생활에 심각한 제동이 걸린다.

이에 모두가 별다른 설명 없이도 공감을 표한 이유는, 우리네 ‘사회생활’에선 ‘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다 한다’라는 선택지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부당함에 적당히 눈감고, 상사나 클라이언트의 비위를 가능한 선에서 맞추며, 관례로 포장된 오랜 악습에도 토를 달지 않는 것이 우리가 줄곧 학습한 ‘사회생활’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에 금이 가고 있다.

중요한 시상식 사회자로 나선 송기백은 “본래 이 정도 시상식은 상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 “수상 소감을 간단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그럴 거였으면 상을 19개나 주지 말죠” “왜 상만 받으면 출석부를 꺼내 드는지 모르겠다. 고맙단 말은 평소에 하라” 등의 말로써 고질적인 시상식 ‘출석상’ ‘퍼주기식 시상’ ‘장황한 나열식 수상 소감’을 꼬집는다. 누군가는 속 시원했겠지만, 시상식의 주최 측이나 수상자들 입장에서는 몹시 당혹스럽다. 그럴수록 송기백의 입지는 더욱더 벼랑 끝으로 내몰릴 뿐이다.

침묵은 과연 미덕일까. 해야 할 이야기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나눈 경계는 정말 온당할까. ‘사회생활’이라는 말로 뭉뚱그려 포장된 다양한 금제는, 조직 전체가 아닌 피라미드의 끝 소수를 위한 것은 아니었을까. 옳고 그름에 대한 공개적이고 생산적인 토론이란 존재할까. 이제 막 첫 삽을 뜬 드라마 ‘비밀은 없어’는 시청자에게 일차원적인 웃음 외에도 여러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작품임에 분명하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필자 박현민은 잡식성 글쓰기 종사자이자, 14년 차 마감 노동자다. 가끔 방송과 강연도 하며, 느려도 밀도 높은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 『나쁜 편집장』을 포함해 총 3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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