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땐 역적, 죽어선 충신…묘비엔 성씨만 남았다

입력 2024. 05. 02   16:24
업데이트 2024. 05. 03   07:58
0 댓글

구보의 산보, 그때 그곳 - 사육신묘 

단종복위운동 펼쳤던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서울 노량진에 묘역·의절사 사당…그중 유성원·하위지 묘는 가묘
입구 지나면 보이는 ‘불이문’, 왕위 찬탈자는 섬기지 않는다는 뜻
목숨 바쳐 지키려 한 ‘인의예지’…부정당한 신념 앞에 허허로울 뿐

 

사육신 성삼문 묘. 성씨지묘라고만 쓰여 있다.
사육신 성삼문 묘. 성씨지묘라고만 쓰여 있다.



노량진의 사육신묘는 조카의 제위를 찬탈한 세조에 맞서 단종복위운동을 펼쳤던 충신들의 묘역이다. 『세조실록』 기록에 따르면 사육신은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을 일컫는다. 홍살문으로 들어서서 ‘왕위 찬탈자는 섬기지 않는다’는 뜻의 ‘불이문(不二門)’을 통과하니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사당이 나타나고 그 뒤로 묘역이 보인다. 역적으로 죽어 묘비에는 성만 적혀 있다. 유성원·하위지의 묘는 가묘이다. 1981년 국사편찬위원회가 김문기(1399~1456)를 같은 반열에 올림에 따라 가묘를 함께 설치했다. 구보는 400년 후 고종대의 문신이던 이건창(1852~1898)이 어느 가을날 찾아와 읊은 시를 떠올린다.

“한 번 절을 하니 풍도가 숙연해지고/ 두 번 절하니 눈물이 비오듯 하네” - ‘육신묘’

단종 3년이던 1455년 윤 6월 10일로 『단종실록』은 끝난다.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선위하며 “어린 나이에 선왕의 대업을 이어받아 국정을 잘 챙기지 못했다”고 말했다. 2년 전 10월 10일 계유정난 때 수양은 정인지·한확·최항·한명회 등과 함께 반대파인 좌의정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등을 제거하고 동생 안평대군 이용을 귀양 보냈다. “간신 김종서 등이 군상을 무시하고 비밀히 이용에게 붙어서 불궤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세조실록』 1년 6월 11일)라고 거사 동기를 밝혀 계유정난의 명분이 왕권을 위협하는 신권 제거에 있음을 알렸다. 수양은 곧이어 문종의 부마(사위) 정종(1437~1461)의 향교동 집에 거처하고 있던 단종을 찾아가 “김종서가 반역을 일으켜 급히 베었다”고 고했고, 어린 단종은 겁에 질려 “숙부 나를 살려 주오”라고 호소했다.(『본조선원보록』) 이조판서·병조판서와 병마도통사 등이 사직했고 수양이 영의정을 비롯, 그 직들을 모두 겸직했다.

정난공신 정인지와 한확을 좌우의정에 앉혀 집권 태세를 갖췄다. 10월 17일 백부인 양녕대군 이제가 안평을 사사(賜死)할 것을 주청하고, 그 이튿날 좌우의정 등이 다시 청하자 수양은 허락했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서 최후를 맞았다.(『단종실록』 1년 10월 18일) 단종의 생모 혜빈 양씨도 귀양길에 올랐다. 우의정 한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집요하게 피를 원하면서 혜빈은 11월 9일 죽음을 맞는다. 정난공신들의 다음 칼끝은 수양의 동생 금성대군 이유로 향하고 있었다. 단종의 매형 영양위 정종도 금성대군과 가까이 지낸 탓에 영월 유배에 처해졌다. 수양은 창덕궁에 머무르던 상왕 단종에게는 사냥에 초대하고 경회루에서 주연을 베푸는 등 배려의 시간을 제공했다. 금성대군의 죄 주청도 허락하지 않았다. 유배지 광주의 목사에게서 동향 보고를 받을 뿐이었다.


사육신묘 입구.
사육신묘 입구.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의절사. 사육신의 위패가 있다.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의절사. 사육신의 위패가 있다.



이 세조의 마음이 바뀌는 계기가 발생한다. 단종복위운동이었다. 세조 2년이던 1456년 6월 2일 성균관 사예 김질과 그의 장인 의정부우찬성 정창손이 성삼문 등의 역모 움직임을 밀고했다. 관련자들이 즉시 구금되고 유성원은 자결했다. 금성대군의 집엔 경계령이 떨어졌다.

1456년 6월 5일 의금부는 “대명률에 따라 관련자는 모두 능지처참한다”고 밝혔다. 6월 7일 세조는 “친자식들은 모조리 목을 매달고, 어미와 딸·처첩·조손·형제·자매와 아들의 처첩 등은 관아 노비로 삼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들은 먼 데로 보내 종살이를 하게 하라”고 추가 지시했다. 해당자는 집현전 학사가 대부분이었다. 세조는 집현전을 ‘역모의 온상’이라며 없애고 그 기능을 예문관으로 옮겼다. 가담자들은 마차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에 처해지거나 새남터에서 참수당했다. 옥사한 박팽년과 자결한 유성원 등에게는 부관참시가 가해졌다. 생육신 가운데 한 명인 “김시습(1435~1493)이 이들의 시신을 현재 위치에 매장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담자의 아내와 딸, 첩실은 그 동료들에게 전리품으로 넘겨졌다. 고인들과 함께 풍류를 즐기고 국사를 논하던 이들이 서로 차지하려 쟁탈전을 벌였다.

『세조실록』을 보면 성삼문의 처 차산과 딸 효옥, 그리고 이승로의 누이 아지는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내려졌고, 이개의 아내 가지는 강맹경에게, 이현로의 처 소사는 이사철에게, 김종서의 딸 숙희와 며느리 내은비는 정인지에게, 이윤원의 아내 대비는 김질에게, 하위지의 아내 귀금과 딸 옥금은 권언에게, 김문기의 아내 봉비는 유수에게, 딸 종산은 최득지의 첩 지장비와 함께 최항에게, 성승의 아내 미치는 이흥상에게, 조완규의 아내 소사와 딸 요문, 최면의 누나는 신숙주에게 돌아갔다. 한명회는 정몽주의 손녀 둘을 받은 바 있음에도 유성원 아내 미치, 딸 백대 그리고 이명민의 아내 맹비, 이징옥의 딸과 첩 외에 남이의 딸 구을금을 세조로부터 하사받았다. 구보는 입에 달고 살았던 인의예지(仁義禮智)에 반하는 이런 처사들에서 말만 앞세웠지 생각과 행동은 사리사욕으로 가득했던 조선 사대부의 이중성을 본다.

1457년 1월 29일 양녕대군이 단종 문제를 거론한 데 이어 2월 1일에는 좌의정 정인지가 백관을 대동해 “단종이 화근이 되고 있으니 도성 밖으로 보내야 한다”고 상언했다. 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됐다. 단종비는 대비에서 군부인으로 격하됐다. 대신들은 계속해서 금성대군과 노산군의 사사를 청했다. 10월 21일에는 대간과 종친 및 의정부·충훈부·육조가 일제히 치죄를 청하자 “죄는 분간(分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교한다. 이후에는 더 이상 관련 언급이 없다. 두 사람은 이날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단종 비는 노비로 떨어졌다. 신숙주가 자기 노비로 달라고 청했으나 세조가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는 1468년 재위 13년에 생을 마감한다.

사육신 묘 앞에 선 구보에게 ‘13년만 견뎠더라면, 그 가족들뿐 아니라 단종과 정순왕후의 비극도 없었을 텐데’라는 허한 상념 한 자락이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세상사는 늘 한결같지 않은 데도 아까운 동량들이 ‘한결같아야 한다’는 성리학적 신념을 놓지 않았던 탓에 몰살당한 까닭이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성리학적 가치, ‘인의예지’마저 부정당해 버렸으니 어찌 허허롭지 않겠는가.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