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의 기개로 55년 시민과 함께 대한민국 지켜

입력 2023. 12. 05   15:27
업데이트 2023. 12. 05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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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만나는 예술, 공공조각-광화문 ‘이순신 동상’과 조각가 김세중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의 첫 프로젝트
1968년 4월 27일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
일본 기운 차단 목적으로 세종로에 건립
위엄 가득한 얼굴·의복 주름 세부적 묘사
강인한 장군 표현…표준영정과 차이 보여
김세중 조각가 작품… 숭고함·경건함 강조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필자 제공
서울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동상. 필자 제공


서울 한복판 광화문에는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거리를 지나는 시민들을 내려다보는 동상이 있다. 이 동상의 주인공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이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1968년부터 그 자리에 서서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순간과 변화 과정을 모두 지켜봤다. 

이순신 동상은 1968년 4월 27일 제막식을 거행하며 공식적으로 설치를 완료했다. 무게 8톤에 작품과 좌대를 합쳐 약 17m에 이르는 거대한 크기다. 수직으로 높게 치솟아 있는 이 동상은 구조상 위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어 상징성이 더욱 강조된다. 동상의 얼굴에는 위엄이 가득하고, 의복은 주름까지 세부적으로 묘사돼 있다. 기단에 부착돼 있는 것처럼 동상의 정식 명칭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상(忠武公李舜臣將軍像)’이다.

이순신 동상은 1966년에 발족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가 제작한 역사 속 위인 동상 중 하나다.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는 이순신 외에도 세종대왕, 사명대사, 김유신, 신사임당 등 많은 위인의 동상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처음 제작을 시작한 것이 바로 충무공 이순신 동상이다. 당시 이순신 장군에 대한 박정희 대통령의 존경심은 남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풍수지리학자들 의견에 따라 탁 트인 세종로에 일본의 기운을 차단할 위인의 동상을 세우고자 했고, 거북선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이순신 장군을 선정했다.

충무공 이순신은 옥포, 한산도, 명량, 노량 등 위대한 해전을 이끌었던 조선의 장군이다.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구한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된 그는 현대 사회문화 전반에 매우 강한 영향력을 끼친 위인이다. 이순신 장군의 업적은 교과서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많이 나왔고, 그의 인품이나 리더십을 소개하는 도서나 영상도 적지 않다. 이렇듯 다양한 매체와 방법을 통해 그 업적과 인품이 잘 알려진 유명한 위인 이순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순신의 실제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사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부분의 역사 인물은 남겨진 영정, 즉 초상화로 그 모습을 짐작할 뿐이다. 서로 다른 얼굴을 한 위인 초상이 마구잡이로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역사 속 인물들의 용모를 공식적으로 지정한 초상화를 ‘정부표준영정’이라고 한다. 1973년 6월 정부는 심의 절차를 제정해 동상이나 영정 제작에 최종 승인된 표준영정만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첫 번째로 지정된 표준영정 또한 이순신 장군의 것이다.

1960년대 전국 각지에 수많은 이순신 동상이 세워졌지만 그 얼굴은 모두 달랐다. 고증을 거치지 않은 이순신의 얼굴이 동상에 사용되면서 수백 개의 다른 동상이 ‘이순신 동상’이라는 같은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다.

급기야 1973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은 충무공 영정을 통일해 동상 건립을 규제하는 방안을 마련, 통일된 영정에 의해서만 동상을 세우도록 했고 ‘충무공을 빙자한 상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라고 지시했다. 이처럼 표준영정의 지정 자체가 이순신 동상이 전국에 질서 없이 세워지는 데 대한 우려에서 시작된 것이다.

현재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으로 지정된 것은 월전(月田) 장우성(張遇聖·1912~2005)이 1953년에 그린 작품으로, 충남 아산 현충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은 정부표준영정 지정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얼굴을 비교해 보면 표준영정과 동상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표준영정이 온화하고 인자한 모습의 이순신을 그리고 있다면, 동상 속 이순신은 위엄 있고 강한 장군으로서의 면모가 엿보인다. 사실 이순신 장군의 표준영정은 현재까지도 논의의 대상이다. 국가기록원 자료에는 충무공 이순신 영정으로 검색되는 여러 장의 사진이 있다. 이순신 장군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눈매가 매섭고 무인의 모습을 한 것이 표준영정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게 사실이다.

동상 조각은 그 상징성과 기념성 때문에 동상 속 인물의 관심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러한 동상들 또한 조각가가 제작한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는 여러 조각가가 위원으로 선정됐고, 동상 제작에 직접 참여했다. 동상은 특히 상징성이 강조되는 만큼 작가의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작가에 따라 다른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김세중의 ‘성모상’(1956). 출처=국립현대미술관
김세중의 ‘성모상’(1956). 출처=국립현대미술관



이순신 동상을 만든 사람은 한국 현대조각 1세대인 조각가 김세중(金世中·1928~1986)이다. 1960년대 당시 서울대 교수였던 김세중은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에서 활동하며 이순신 외에도 장충단공원의 유관순 동상, 경기도 여주 영릉의 세종대왕상 등 여러 동상 조각과 제2한강교(양화대교)의 유엔탑, 국회의사당의 ‘애국애족의 상(애국상)’ 등 기념물을 제작했다. 신실한 가톨릭 신도였던 김세중은 위인 동상 외에도 ‘예수상’ ‘성모자상’ 같은 종교적인 조각 작품도 상당히 많이 만들었다. 단순하고 간결하게 제작된 그의 종교 조각 작품들은 숭고함, 경건함을 강조하며 본질을 담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를 잘 보여 준다. 

김세중은 1983년 국립현대미술관 10대 관장으로 부임해 예술행정가로서 활약하기도 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에 위치했던 당시 관장으로 재직하며 과천관 건립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다. 1986년 작고 후 세워진 ‘김세중기념사업회’는 현재 작가의 뜻을 기리는 여러 활동을 하고 있으며, 서울 효창동에서 김세중미술관을 운영 중이다. 김세중은 광복 이후 척박했던 한국 미술계에서 조각가, 교육자, 행정가로서 전방위적 활동을 했던 한국 현대미술의 중요한 인물이다.

이순신 동상은 여러 차례 철거 논란에 시달리기도 했다. 칼의 위치와 생김새, 갑옷, 얼굴 등 주로 고증에 대한 논란이었다. 그러나 김세중은 사진과 똑같은 영정을 동상으로 만드는 것보다 작품에서 풍기는 사상성 강조에 중점을 둬야 한다며 공공조각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그간의 논란은 철저히 승리를 상징하기 위한 작가의 고유한 선택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최근까지도 이순신 동상은 충무로에 있어야 한다는, 장소에 대한 논란 또한 계속됐지만 시민들의 반대로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광화문을 지켜 온 이순신 동상. 광화문광장 주변은 여러 차례 모습을 바꿨지만 이순신 동상은 오랜 시간 그 자리에서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이제는 이순신 동상이 없는 광화문광장을 상상할 수 없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에 대해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필자 김유진은 공공미술에 대한 논문을 썼고, 문화라는 전체적 맥락 안에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예술에 대해 연구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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