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형제, 73년 만에 대전현충원서 함께 잠들다

입력 2023. 11. 23   16:59
업데이트 2023. 11. 23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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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상락 하사·최임락 일병 안장식
1950년 21·19세 나이에 장렬히 전사
신원식 장관 “자유·평화 위한 헌신 경의”
박안수 육참총장 “이기는 육군 만들 것”

23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호국의 형제' 고(故) 최상락 하사·최임락 일병의 안장식이 엄숙히 거행되고 있다.
23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호국의 형제' 고(故) 최상락 하사·최임락 일병의 안장식이 엄숙히 거행되고 있다.



두 형제는 가족과 조국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기꺼이 총을 들었고, 6·25전쟁의 치열한 전투 속에 장렬히 전사했다. 희생과 헌신으로 대한민국의 자유·평화를 수호했지만, 그들의 유해는 70년이 지나도록 가족의 품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러던 지난 7월 극적으로 동생의 유해가 미국 하와이에서 국내로 봉환됐고, 정부는 형제의 뜨거운 애국심을 기리고자 ‘호국의 형제’로 명명했다. 형 고(故) 최상락 하사와 동생 고 최임락 일병 형제의 이야기다. 23일 국립대전현충원에서 거행된 ‘호국의 형제’ 안장식을 다녀왔다. 글=서현우/사진=김병문 기자


이른 아침까지 흩날리던 비는 안장식을 알리는 군악대의 추모 연주와 함께 멈췄다. 초겨울 차가운 공기가 대전현충원 경내를 감쌌지만, 행사가 진행된 현충관 안은 호국 영웅을 기리는 장병들과 유가족의 뜨거운 마음으로 채워졌다. 

행사는 의식과 안장으로 구분해 이뤄졌다. 의식은 영현 입장을 시작으로 고인에 대한 경례, 유해발굴 경과 및 참전전사 보고, 추모사, 종교의식, 헌화·분향 등이 이어졌다.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오영대 인사기획관이 유가족에게 전달한 서신에서 “대한민국의 자유·평화를 위해 싸운 두 분 형제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며 “두 분 형제의 호국 의지를 받들어 대한민국의 자유·평화·번영을 위해 힘쓸 것이고, 지금도 이름 모를 산야에 계시는 호국 영웅들의 유해를 모시는 그날까지 정성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행사를 주관한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은 추모사에서 “선배님들의 핏값으로 오늘도 태극기가 창공에 휘날리고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선진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며 “고귀한 희생과 헌신이 헛되지 않도록 확고한 대적관으로 무장해 매 순간 이기는 것이 습관이 되는 육군을 만들어 가겠다”고 힘줘 말했다.

이후 안장을 위해 유가족과 참석자들은 영현과 함께 413묘역으로 이동했다. 묘비 앞에 마련된 추모석에는 형제의 막냇동생 최용(79) 옹이 쓴 추모글이 적혀 있었다. ‘이제 나라 걱정은 마시고, 우리 땅에서 편히 쉬시이소’라는 추모글에서는 두 형에 대한 동생의 애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행사에서 최옹은 “8남매 중 막내인 저만 남았는데 이렇게 두 형님을 넋이라도 한자리에 모실 수 있어 꿈만 같다”며 “어려운 과정을 거쳐 형님들을 호국보훈의 성지에 안장할 수 있도록 고생하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고 소회를 밝혔다.

안장식이 끝나서도 유가족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형제의 묘를 하염없이 바라보거나, 연신 손으로 눈가를 닦아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장병들의 눈시울도 붉게 물들었다.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의 형제’ 묘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호국의 형제’ 묘비.



가족과 조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형 최상락 하사는 1929년 4월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6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가족에 따르면 부모님과 농사를 지으며 장남 역할을 한 든든한 아들이었다. 광복 이후 남북 사이의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동생들에게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지켜주기 위해 1949년 2월 부산에 있는 5연대에 자진 입대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3사단 23연대 소속으로 낙동강방어전선에 투입됐고, 울진-영해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동해안 최대 병참기지인 경북 포항을 사수하기 위해 북한군5사단과 격전을 펼친 영덕-포항전투에 나서 1950년 8월 21세의 나이로 산화했다.

동생 최임락 일병은 1931년 1월 집안의 셋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열정적이고 책임감이 강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밤잠을 마다하며 일하던 중 전쟁이 나자 형의 뒤를 따라 입대했다.

미7사단 카투사로 배치돼 일본 요코하마에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작전에 투입됐다. 이후 북진작전에 합류해 함경북도 이원항에 상륙한 뒤 장진호전투에서 1950년 12월 19세의 나이로 장렬히 전사했다.

동생 최임락 일병의 유해는 1995년 미국이 북한지역 발굴 유해 신원을 확인하는 ‘6·25전쟁 전사자 확인 프로젝트(KWIP)’로 수습돼 하와이에 있는 미 전쟁포로·실종자 확인국(DPAA)으로 인계됐다. 임시 안치됐던 그의 유해는 한미 공동감식 과정을 거쳐 국군으로 판정되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됐다. 지난 7월 26일 현역 군인인 조카 최호종 해군상사의 품에 안겨 공군특별기(KC-330)를 타고 F-35A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먼 길을 돌아 73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본지 7월 26일 자 2면)

형 최상락 하사의 유해 소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시신·유골이 없어 묘지 안장이 제한됐으나, 두 형제의 숭고한 헌신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다하기 위해 관계부처 협의로 이날 함께 안장하게 됐다. 국립묘지 내 6·25전쟁 전사자 호국의 형제 묘역 조성은 5번째로, 그중 대전현충원에서 진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1~3호 형제는 서울현충원에, 4호 형제는 제주호국원에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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