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추석 연휴, 걷기 좋은 ‘한양도성 순성길’
일주일 뒤면 추석이다. 모처럼 가족을 만나고 맛난 명절 음식을 맛볼 생각에 벌써 설레기 마련이다. 긴 연휴를 이용해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많지만, 교통 체증 때문에 지레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 생각을 바꿔보자. 추석 때만큼 서울이 한갓질 때도 없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느끼며 한산한 도심을 산책하기 더없이 좋은 때다. 초가을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다면 ‘한양도성 순성길’을 추천한다. 조선 시대 수도 ‘한성’을 지키기 위해 쌓은 성곽을 따라 걷는 18.6㎞ 길이다. 모두 6개 코스로 이뤄졌는데 자연과 도심 풍광을 두루 느끼는 4개 코스(낙산·남산·인왕산·북악산)를 소개한다. 혈기 왕성한 청춘은 하루 만에 모든 코스를 주파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을은 느긋이 걷는 게 어울리는 계절이다.
낙산 구간 3.2㎞-조선시대·근현대 역사의 흔적 ‘오롯이’
낙산(126m)은 산보다는 언덕에 가깝다. 서울의 여느 산처럼 우거진 숲은 없지만 호젓한 분위기를 느끼며 산책하기 좋다. 성곽 주변 마을을 구경할 수 있고, 일출·일몰도 근사하다. 4개 구간 중 난도가 가장 낮다.
낙산 구간은 1·4호선 동대문역에서 출발하면 된다. 흥인지문(동대문)을 구경하고 낙산공원 방향으로 걷다 보면 한자가 새겨진 성돌이 눈에 띈다. 돌을 쌓은 사람의 이름이다. 한양도성에는 이처럼 사람 이름과 출신 지역을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280개에 달한다. 1396년부터 팔도에서 백성 12만 명을 동원해 성을 쌓았다. 성이 훼손되면 돌에 새겨진 담당자를 불러 보수하도록 했다. ‘공사 실명제’였던 셈이다.
낙산은 성 안팎을 넘나들면 재밌다. 성 안쪽은 대학로 쪽 충신동과 이화동이고, 성 바깥은 창신동이다. 창신동은 6·25전쟁 피난민이 판자촌을 이루고 살던 동네다. 1975년 무허가 판잣집을 철거하면서 성곽을 복원했는데 여전히 피난민이 많이 살고 있다.
낙산은 어스름한 시간이 매력적이다. 낙산공원에서 보는 일몰도 근사하고, 오후 6시 성벽을 비추는 조명이 들어오고 가가호호 불이 켜지면 낭만적이다. 한성대, 가톨릭대와 젊음의 거리인 대학로가 가까워서 팔짱 낀 연인이 많이 보인다.
남산 구간 6.7㎞-서울타워 찍고 남대문시장 맛집 탐방
서울의 랜드마크 남산(270m)을 관통하는 코스다. 남산 구간은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시작하는 걸 추천한다. 숭례문 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것보다 경사가 완만하기 때문이다. 장충체육관, 신라면세점 뒤로 길이 나 있다. 높이 5m가 족히 넘는 성곽 바로 옆에 데크가 깔려 있어 걷기 편하다.
신라호텔과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을 지나 국립극장 쪽으로 방향을 틀면 본격적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나무 계단 650개로 이뤄진 제법 가파른 길이 이어지는데 경사가 급해서인지 주말에도 이길 만큼은 늘 한산하다. 가을철 단풍도 아름다운 구간이다.
동대입구역에서 출발하는 경우 빠르면 40분, 느긋이 걸어도 1시간이면 정상부 N서울타워에 닿는다. 멀찍이서 N서울타워를 바라보는 것보다 N서울타워에서 바라보는 서울이 더 멋지다. 케이블카를 타거나 남산순환버스를 타고 손쉽게 정상까지 갈 수 있지만 걸어서 오른 뒤 마주하는 풍광이 훨씬 벅차다.
팔각정을 지나 숭례문 방향으로 내려가면 넓은 공터가 나온다. 일본이 제사를 지내는 ‘조선신궁’이 있던 자리로, 2차 대전 패망 후 불태워버렸다. 그 흔적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으나 최근 한양도성 전시관으로 탈바꿈했다. 백범광장을 지나 남대문시장으로 내려가면 무얼 먹든 꿀맛이다. 갈치 골목, 칼국수 골목 어디로 갈지 늘 갈등이 생긴다.
북악산 구간 4.7㎞-40년 만에 열린 길…경복궁 ‘한눈에’
북악산(백악산·342m)은 경복궁과 청와대 뒤쪽에 버티고 선 서울의 명산으로 한양도성 순성길 중에 가장 높다. 보안이 철저했던 과거에는 다른 구간과 달리 출입증을 받아야 했지만,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한 뒤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됐다. 지금은 24시간 개방한다.
북악산 구간은 동쪽에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으면 경사가 완만하다. 성북동에서 출발하면 된다. 와룡공원을 지나면 오래된 가옥이 밀집한 북정마을이 보인다. ‘성북동 비둘기’를 지은 김광섭 시인과 만해 한용운 선생이 살던 동네다. 1시간쯤 더 걸으면 말바위 안내소가 나온다. 숙정문을 지나 정상 ‘백악마루’에 오르면 경복궁과 세종대로가 훤히 보인다. 백악마루에서 30분을 더 걸으면 총탄 자국 선명한 소나무 한 그루가 나타난다. 1968년 1월 21일, 남파 간첩 김신조 일행이 우리 군·경과 총격전을 벌인 현장이다. 이 사건 이후 북악산은 40년간 일반인의 출입을 막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이 2007년 성곽길 탐방로를 개방했다.
반세기 가까이 꽁꽁 잠겨 있어서일까. 북악산은 한양도성에서도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느끼기 가장 좋다. 거의 전 구간 데크가 깔려 있어 걷기에도 편하다. 한양도성 순성길과는 조금 다른 북악산 등산로도 있다. 지난해 청와대를 개방하면서 칠궁 뒷길로 북악산 오르는 길이 새로 생겼다. 대통령의 산책로를 걸어보고 싶다면 이 길도 추천한다.
인왕산 구간 4㎞-편한 길은 심심하다면 바윗길로!
인왕산(338m) 역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걸어야 가파른 오르막길을 피할 수 있다. 조선 시대 문루가 그대로 남아 있는 창의문을 출발점으로 삼으면 된다. 국민 누구나 아는 시인 윤동주를 기리는 윤동주문학관이 창의문 인근에 있으니 관람해도 좋겠다. 시인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 인왕산 자락 누상동에 살았다.
인왕산은 요즘 MZ세대에게 인기다. 도심에서 가까우면서도 장쾌한 풍광을 볼 수 있어서다. 풍경만 놓고 보면 4개 구간 중 으뜸이라 할 만하다. 쉬엄쉬엄 오르막길을 걷다 보면 금세 정상에 닿는다. 기차바위, 치마바위 같은 커다란 바위와 성곽이 어우러진 풍경이 압도적이고 청와대와 경복궁, 서울 시내가 막히는 것 없이 한눈에 들어온다. 북한산의 웅장한 산세도 잘 보인다. 날이 맑으면 멀리 인천 쪽으로 해가 지는 풍광도 감상할 수 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내리막길은 바위투성이다. 경사가 급한데다 바위가 미끄러워 밧줄을 붙들어야 하는 구간도 있다. 산책하듯 편하게 걷는 길만 이어진다면 되레 심심할 테다. 가을에는 성벽 주변에 코스모스가 만개해 운치를 더한다.
인왕산 구간의 종착지는 돈의문 터다. 2017년 복고풍으로 꾸민 ‘돈의문 박물관 마을’을 둘러보거나 서울역박물관을 관람하는 것도 추천한다. 물론 순성길을 다 걷고 무릎 상태가 성하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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