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하고 단단하게 빛나는 구석

입력 2022. 12. 20   16:41
업데이트 2022. 12. 2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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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다, 품다, 화랑탐방기 - 누크갤러리


누크갤러리 전시장 모습. 필자 제공
누크갤러리 전시장 모습. 필자 제공

 

주택가 안에 있어 초행인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은 누크갤러리 전경.
주택가 안에 있어 초행인 사람은 찾기가 쉽지 않은 누크갤러리 전경.

 

누크갤러리 전시장 모습.
누크갤러리 전시장 모습.

 

평창동에는 화랑들이 많다. 평창동은 지하철이 없다. 대중교통으로는 접근이 쉽지가 않다. 시내에서 가려면 자하문 고개를 넘어서 가야 한다. 힘들게 도착한 평창동은 길이 다 언덕길이다. 걷기가 쉽지 않다. 교통이 불편한데도 미술관과 화랑이 많고 화가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들이 평창동을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다. 예전에는 평창동에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세검정은 사과 비슷하게 생긴 능금을 키우던 능금밭이었다. 평창동은 필지가 넓고 크다. 필지가 커서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는 미술관을 짓기에 좋다. 자하문의 환기미술관, 석파정 서울미술관, 평창동의 토탈미술관, 김종영미술관 등 미술관이 많다. 

서촌에서 자하문을 넘어서면 마치 산촌에 온 듯한 청량하고 호젓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종로구 평창동인데 도심 속의 종로와는 너무나 다르다. 서울인데 서울 같지 않은 곳이다. 세검정의 시원한 물길에 삼림과 녹지가 많아 여유가 있어 보인다.

북악터널로 향하는 큰길은 길이름도 ‘평창문화로’다. 북악터널에 못 미쳐 왼쪽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있다. ‘평창30길’이다. 이 길을 따라 오르면 삼거리에 가나아트센터가 나타난다. 갤러리현대, 국제갤러리와 더불어 우리나라 화랑계를 대표하는 대형화랑이다. 이 삼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미술관과 갤러리가 모여 있다. 이 삼거리에서 평창30길을 계속 오르면 세줄갤러리와 원로작가 김구림(1936~ )의 작업실이 나타난다.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평창32길’로 접어들면 토탈미술관과 김종영미술관이 나타난다.

자하문 환기미술관의 주인공 화가 김환기(1913~1974)와 평창동 김종영 미술관의 주인공 조각가 김종영(1915~1982)은 친했다. 해방 직후 한때 서울대에서 동료 교수로 근무했다. 6·25 전쟁 때 경남 진해에서 종군화가로 근무하던 김환기는 과자가 든 배낭을 매고 산을 걸어 넘어 창원 김종영의 집을 찾기도 했다. 인품이 넉넉했던 이 두 사람처럼 평창동 골짜기도 넉넉한 인정의 기운이 흐른다.

누크갤러리는 김종영미술관 앞에 있다. 토탈미술관에서 평창 32길을 따라 동진하다, 김종영미술관에 못 미쳐 왼쪽 언덕길인 ‘평창34길’을 오르면 오른쪽 첫 번째 골목에 있다. 주택가 안에 있어 초행인 사람은 길을 찾기가 쉽지 않다. 건물 입구가 갤러리나 미술관 양식으로 다른 주택들과 구별된다. 근처까지만 가면 찾을 수는 있다. 주소는 종로구 평창34길 8-3이다.

누크갤러리의 시작은 삼청동 언덕길이었다. 차량이 많이 다니는 삼청로가 아닌 호젓한 윗길 북촌로에 갤러리가 있었다. 삼청동 일대가 내려다보이고 경복궁 건너 서촌 일대와 인왕산이 원경으로 포착되는 전망 좋은 작고 알찬 건물이었다. 봄에는 파릇한 신록이, 가을에는 붉은 만산홍엽이 눈앞에 펼쳐졌다. 2013년에 개관했으니 신생 갤러리다. 그럼에도 누크는 좋은 전시를 하는 갤러리로 금방 이름이 알려졌다.

누크갤러리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 중의 하나가 ‘2인전’의 기획이었다. 개성이 비슷한 두 사람을 묶으면 미감의 통일성이 주어진다. 안정적인 전시가 된다. 찾아보면 이런 전시는 많다. 그런데 누크갤러리가 시도한 것은 두 사람의 개성이 달라 보여, 상식적으로는 이 둘을 동시에 하나의 공간 속에 병치하기가 힘들 것 같은 전시들이었다. 이게 성공했다. 우리는 많은 미술을 이렇게 저렇게 분류된 집합의 틀 속에 넣어서 본다. 그 집합의 조건은 미술사가 만든 상식이고 관행이다.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집합의 틀 속에 작가와 작품을 넣어서 보면 이해와 감상의 효율성은 높아지겠지만, 집합의 조건을 위해서 작가의 작품이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무한한 가치와 가능성은 멸실되고 만다. 한 작가의 작품에서 그동안 상식적인 안목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멸실할 뻔했던 잠재적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고 이와 공유할 수 있는 또 다른 작가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해 이 둘을 미학적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도와 실천이 누크갤러리의 2인전이었다. 이건 매우 어려운 도전이다. 미술에 정통하지 않으면 시도하기가 힘들다.

대표적인 2인전으로는, 개관전인 ‘김지원·박소영’전을 비롯해 ‘정직성·홍승혜’전, ‘정주영·이강원’전, ‘김도균·이은우’전, ‘유근택·강홍구’전, ‘노충현·샌정’전 등이 있었다. 2013년 삼청동에서 시작된 누크갤러리의 2인전은 2018년 갤러리가 평창동으로 옮기고 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이들 2인전은 관객들에게 그동안 미술을 보아왔던 상식과 관습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져 조형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체험을 선사했다. 2인전에 등장한 두 작가의 만남이 엉뚱하고 생뚱맞은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인데도 그 지극한 당연함을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쳐줬다.

누크갤러리의 조정란(1961~ ) 대표는 서울대 미대 응용미술과를 졸업한 후 뉴욕주립대학 미술대학원을 졸업한 재원이다. 상업 갤러리의 갤러리스트에게선 발견하기 힘든 깔끔하게 정돈된 정신성이 도회적이고 이지적인 용모에서 풍겨 나온다. ‘누크’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을 뜻한다. 소극적인 이름이다. 소극은 때때로 적극이 하지 못하는 것을 이루기도 한다. 소극으로 응축된 힘이 다른 통로를 찾아 큰 힘으로 증폭된다. 2인전의 아이디어도 그런 경지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상업적인 성공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무욕의 심경으로 담담하게 대했을 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미술의 숭고한 경지를 누크갤러리가 추구하고 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설사 지나치다 하더라도 꼭 하고 싶은 말이다. 금력에 너무 들뜬 나머지, 표현과잉이 돼 버린 작금의 미술계에 누크갤러리 같은 은은하고 단단하게 빛나는 ‘구석’이 있다는 건 큰 위로다.

2인전, 개인전, 단체전을 다 포함해 삼청동 시절에는 연 6회 가량의 전시를, 평창동으로 와서는 연 10회 가량의 전시를 해오고 있다. 누크갤러리의 은은하고 단단한 힘은 계속될 것이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황인 미술평론가는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인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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