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안(樂安)! 고을 이름 그대로 즐겁고(樂) 편안함(安)이 느껴진다. 멀리 있을 남쪽 바다를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니 바로 뒤 북쪽으로 해발 667.9m의 금전산이 등을 받쳐주듯 든든하다. 서쪽 백이산(584.3m)과 동쪽 오봉산(591.5m)이 있어 왼쪽, 오른쪽 걱정이 없어 보인다.
그리 높게 느껴지지는 않는 성(城), 낙안읍성은 그렇게 높지도 낮지도 않은 산에 둘러싸인 평지에 자리해 있다. ■ 편집 = 이경하 기자
■ 임경업 장군이 다시금 고쳐 쌓았다
우리나라의 성곽은 산에 지은 산성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런 평야 지대 또는 평야에 연해서 고을마다 백성과 관리가 함께 삶을 영위(행정)하면서 적을 막도록(군사) 건립된 읍성(邑城)도 수 백을 헤아린다. 대부분 훼손되었지만,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 300여 곳에 이른다.
600여 년의 역사와 전통 민속문화, 낙안팔경이 조화를 이루는 낙안읍성은 옛 자취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복원된 성으로 현재 일반인들이 성내에서 거주하는 곳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조선 시대 임경업 장군이 하루 만에, 더욱이 누이와 내기까지 하며 이 성을 쌓았다고 한다. 전설 속에는 지혜로운 임 장군 누나의 아우 사랑 이야기가 곁들여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고려 말부터 왜구가 이곳으로 자주 침입하자, 조선 태조 6년(1397)에 이 고장 출신 절제사 김빈길 장군이 흙으로 읍성을 쌓았다. ‘세종실록’에는 1424년 9월부터 성을 돌로 다시 더 크게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인조 4년(1626)에 이르러 낙안군수로 부임한 임경업 장군이 다시금 고쳐 쌓았다. 성의 둘레는 1,410m에 직사각형 형태이며 성벽의 높이는 4m이다.
■ 이순신, 명량해전 앞두고 이곳 찾아
낙안읍성 축성 목적은 왜구를 막고자 하는 군사적 기능에 있었다. 성곽으로서 읍성이 방어적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는가 하는 문제는 차지하고, 군사와 관련된 기록과 전설이 몇 가지 전해온다.
임진왜란 중에는 군수와 병졸들이 관아를 비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따라 전투에 참여했는데, 그 사이를 일부 백성들이 관아를 습격하여 노비 문서를 불태웠다고 한다. 실제 이순신 장군이 낙안읍성을 찾은 건 1597년 8월 9일(양력 9월 19일)이었다. 명량대첩을 앞둔 시기, 조선 수군을 재건하면서 보성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후퇴하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등 왜군들이 낙안에서 가까운 순천에 왜성을 치고 장기전을 펼친 영향으로, 많은 주민들이 피난을 떠나 폐허가 되다시피 했다고 한다. 동학혁명 때에도 고흥, 보성, 순천 일대의 동학군들이 읍성을 점령한 후 농민들을 수탈하던 아전들을 징계하면서 재물을 징발당하고 많은 집이 불탔다. 현재 남아있는 읍성의 모습은 성벽의 축조나 적대의 존재 등에서 조선 초기 성곽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
■ 98세대 230여 명 실제 거주하는 고풍 마을
민가 지역에는 1977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아홉 채의 가옥을 포함하여 성내에는 98세대 230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농사도 짓고, 여행객을 대상으로 음식과 기념품 판매도 한다. 가을걷이 체험 가옥 등 조상들의 옛 생활을 체험해볼 수 있는 가옥들이 지정되어 있다. 민박도 한다. 겉은 초가집이지만 방은 현대적이다. 밤에는 각 가정에서 나오는 불빛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어두운 산색과 어울려 더없이 조용하고 평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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