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
미 서부극 낡고 익숙한 문법
대학로식 말맛으로 재구성
속절없이 터지는 B급 개그
극 꽉 채운 패러디·농담에
쉴 새 없이 터지는 유쾌함
팔짱을 꼿꼿이 끼고 입가에 미소 한 자락 올리지 않은 채 이 극을 완주할 수 있을까. 만약 가능하다면 MBTI 결과 T와 I의 초강력 혼합 결정체라고 인정하겠다.
성종완이 극본과 가사, 연출을 맡고 김은영이 음악을 붙인 창작뮤지컬이다. 2022년 초연, 2024년 재연을 거쳐 올해 세 번째 시즌. 오는 27일까지 서울 대학로 NOL 유니플렉스 1관에서 공연한다.
뮤지컬 ‘웨스턴 스토리’는 대놓고 웃기기로 작정한 작품이다. 미국 서부극의 낡고 익숙한 문법을 대학로식 말맛으로 다시 볶았다.
마카로니 웨스턴은 1960~1970년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에서 꽃핀 서부극이다. 선악의 경계를 흐리고 과장된 총격과 비장한 음악, 먼지투성이 황야와 말 없는 총잡이를 한껏 멋 부려 보여 줬다. 대표작으로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한 ‘황야의 무법자’와 ‘석양의 무법자’, 프랑코 네로의 ‘장고’가 있다. 미국이 만든 서부극을 유럽인이 자기 입맛대로 다시 요리한 것이다.
|
|
‘웨스턴 스토리’도 비슷하다. 다만 총잡이에게 스파게티 대신 대학로의 농담을 먹였다. 말장난, 몸 개그, 패러디, 애드리브를 후추 삼아 사정없이 뿌렸다. 미국의 웨스턴이 이탈리아에 건너가 마카로니 웨스턴이 됐다면 대학로에서는 ‘마로니에 웨스턴’이 됐다.
때는 1886년, 미국 애리조나주의 가상도시 그린밸리시티다. 다이아몬드살롱의 주인 제인 존슨은 이 황량한 동네를 당장이라도 뜨고 싶다. 목적지는 뉴욕.
문제는 돈이다. 제인 존슨은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 히로인 조세핀 마커스, 악당 조니 링고에게 현상금이 붙었다는 사실을 이용해 한몫 잡으려 한다. 살롱을 헐값에 내놓고 근처에 철도가 들어온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린다.
그런데 계산표에 없던 인간이 1착으로 들어온다. 빌리 후커다. OK목장 결투에서 아버지를 잃었다고 믿는 총잡이인데 와이어트 어프와 조세핀 마커스, 조니 링고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눈이 이글거린다.
마침내 전설의 세 사람이 차례로 나타나는데, 간판만 전설이다. 자칭 와이어트 어프는 프레디 심슨, 조세핀 마커스는 케이트 코벳, 조니 링고는 잭 마시다. 셋 다 유랑극단에서 전설적 인물의 배역을 연기하다가 돈을 떼먹고 도망친 배우들로, 철도 소문을 듣고 살롱까지 흘러들어 와 유명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
그러니 처음부터 꼬인다. 돈을 벌려는 제인 존슨, 복수하려는 빌리 후커, 부자가 되고 싶은 가짜 와이어트 어프·조세핀 마커스·조니 링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건 ‘배우가 배우를 연기한다’는 구조다. 실제 배우가 프레디 심슨과 케이트 코벳, 잭 마시라는 유랑극단 배우를 맡고 그 인물들이 다시 와이어트 어프와 조세핀 마커스, 조니 링고를 연기한다. 가면 위에 가면을 한 겹 더 쓴 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웃었던 장면이 있다. 이미 몇 곡의 넘버를 부른 와이어트 어프가 또다시 비장하게 노래를 시작하려 하자 빌리 후커가 잘라 말한다. “노래하지 마. 시간 없어.”
내가 관람한 날 역시 최고의 코믹 앙상블을 만끽할 수 있었다. 제인 존슨의 조영화, 빌리 후커의 정욱진, 와이어트 어프의 송원근, 조세핀 마커스의 최수진, 조니 링고의 정상윤, 버드의 이동희, 해리의 신준석이 저마다 웃음을 피스톨에 담아 빵빵 쏘아댔다.
조세핀 마커스 역을 맡은 최수진의 변신은 신선하기 그지없다. 비련의 여주인공, 신비로운 미모의 여인으로 주로 만났던 배우다. 기대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술술 소화할 줄 몰랐다. 연기의 바운더리가 팍팍 넓어지고 있다.
지난 시즌 조세핀 마커스를 연기한 이영미의 무대도 궁금해진다. ‘카리스마 여왕’ 이영미라면 최수진과는 많이 다른 색깔을 보여 주지 않았을까 싶다.
이런 장르의 극을 즐길 때는 만반의 준비 같은 건 필요 없다. 완벽한 기승전결, 깊은 교훈을 기대할 것도 없다. 무대에서 벌어지는 상황 자체와 인물들이 난사하는 대사에 온전히 뇌를 맡겨야 맛이 산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설정을 유쾌한 극적 허용으로 넙죽 받아들일 때 비로소 B급 코미디 본연의 맛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송원근의 와이어트 어프는 정말 좋았다.
이 작품은 회차마다 재미가 달라진다. 배우와 배역 조합에 따라 애드리브와 웃음 포인트가 바뀌기 때문이다. 같은 극을 다시 봐도 다른 공연처럼 느껴질 정도다. 게다가 아는 만큼 보이는 작품이다. 다른 뮤지컬 작품들에서 슬쩍 따온 패러디가 난무한다. 뮤지컬 마니아들이 이 작품을 좀 더 뜨겁게 애정하는 이유다. 초심자는 상황을 보고 웃고, 고인 물은 어디서 본 냄새까지 맡아 가며 웃는다. 어느 쪽이든 입장료에 웃음은 포함돼 있다.
후반부에 이들은 다이아몬드살롱에서 공연을 벌이고, 남의 이름을 빌려 살던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살길을 찾아간다. 제인 존슨도 살롱을 버드와 해리에게 맡기고 동부로 향한다.
제법 훈훈하게 끝나는가 싶었는데, 마지막 농담 한 발이 남아 있었다. 진짜 철도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날아든 것이다. ‘가짜 와이어트 어프’ 프레디 심슨은 단돈 1달러에 살롱을 살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에 뒤늦게 절규한다.
‘웨스턴 스토리’는 끝까지 큰 웃음을 줬다. 이 작품에서 총잡이는 멋있기 전에 우스워지고, 비장해지려는 순간 누군가 옆에서 꼭 초를 친다. 이른바 ‘한국인이 좋아하는 결말’이 수시로 튀어나왔다. 그러니 마카로니보다 마로니에가 더 잘 어울릴 수밖에. 총보다 농담을 잘 쏘는 총잡이들 이야기. 맛있었다.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