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의 희생, 독립 밑거름 되다

입력 2026. 09. 01   15:23
업데이트 2026. 09. 01   15:30
0 댓글

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Ⅲ - 아프리카-보츠와나 ③

2차 대전 영국군 편입 최전선 투입
식견 넓히고 귀환 정당한 권리 요구
무력 충돌 피해 법치·인종 화합 지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 국가
로디지아와 국경분쟁 방위군 창설

 

보츠와나 가보로네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2차 세계대전 전몰장병 추모비.
보츠와나 가보로네 국회의사당 앞에 세워진 2차 세계대전 전몰장병 추모비.


아프리카의 내륙국인 보츠와나는 강력한 군사력을 지닌 남아프리카공화국, 짐바브웨, 나미비아로 둘러싸여 있다. 힘의 불균형 속에서 인구 250만 명에 불과한 이 작은 나라가 평화를 지켜낸 동력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련한 외교력, 깨끗한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였다. 영연방 체제 안에서 강대국과의 안보 동맹 또한 튼튼한 국방의 울타리가 됐다. 그러나 동맹체제로 인접국 위협을 극복해온 보츠와나도 2차 세계대전과 국경분쟁으로 많은 장병이 고귀한 생명을 바쳐야만 했다.


보츠와나 청년의 세계대전 참전

가보로네 국회의사당 앞에는 2차 세계대전 전몰장병 추모비가 있다. 유럽 전선과 수천㎞ 떨어진 보츠와나 청년들이 왜 전쟁터로 가야 했을까? ‘국제외교에서 공짜 점심은 없다!’는 냉엄한 명제는 이 작은 나라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당시 영국은 유럽·북아프리카 전선을 지원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에 부족장들은 영국 보호령과 독립 국가를 염두에 두고 전쟁 참여를 선언했다. 1939~1945년 1만27명의 보츠와나 청년이 영국군에 편입됐다. 이 시기 보츠와나 인구는 불과 25만 명. 성인 남성의 20%에 달하는 대규모 동원이었다. 후방 지원부대로 출발한 보츠와나군은 전황이 악화하자 최전선에 투입됐다. 동원병력 중 300여 명이 전사했다. 전몰장병 추모비에는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유럽과 중동에서 세계적 식견을 넓히고 돌아온 참전용사의 귀환으로 보츠와나 사회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 땅에 그에 걸맞은 권리를 달라

몰레피 피라네는 전쟁 당시 소수 종족의 부족장이었다. 상사 계급을 부여받은 그는 ‘영국육군 아프리카 개척대’ 소속으로 전쟁터로 나갔다. 피라네는 참전 경험을 이렇게 전했다. “보츠와나 청년들은 이탈리아 전선을 누비면서 백인에 대한 인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백인 역시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전투 중 공포에 떨며 울부짖는 백인 병사, 심지어 굶주림에 지쳐 흑인에게 구걸하는 백인도 봤다. 흑인들은 연합군 병사와의 교류에서 인종 차별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전쟁이 끝난 뒤 보츠와나 참전용사들은 “영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우리 땅에 그에 걸맞은 권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운전, 기계정비, 통신, 중장비 운용 등 현대적인 군사기술을 경험했다. 1960년대 초 카마가 보츠와나 독립을 위해 정당을 설립했다. 여기엔 전국 조직망을 갖춘 ‘참전용사 연합회’가 큰 역할을 했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한 이들은 극단적인 무력 충돌은 적극 회피했다. 대신 카마가 제시한 ‘법치, 입헌주의, 인종 화합’ 노선을 전폭 지지했다. 이처럼 청년의식의 변화로 보츠와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독립 국가를 건국할 수 있었다.

 

 

레소마 사건 전사자의 장례식을 찍은 기록사진.
레소마 사건 전사자의 장례식을 찍은 기록사진.

 

보츠와나 국립대학교 전경.
보츠와나 국립대학교 전경.

 

로디지아와의 국경분쟁 ‘레소마’ 사건 

1966년 9월 30일, 영국 식민지 베추아날란드는 새로운 국가 ‘보츠와나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인접국인 로디지아(현 짐바브웨)는 백인 정권과 원주민의 처절한 내전이 계속됐다. 백인 정권은 흑인 해방군 소탕을 명목 삼아 수시로 보츠와나 영토를 침범했다. 여기에 로디지아의 내전이 격화하면서 수만 명의 난민이 국경으로 넘어왔다.

난민촌은 해방군의 훌륭한 훈련 거점이었다. 로디지아 특수부대는 난민촌을 수시로 습격했다. 중립국 보츠와나는 영토와 국민을 더 이상 보호할 수 없었다. 결국 1977년 보츠와나 방위군을 급히 창설했다. 1978년 2월 27일 보츠와나군은 국경선에서 로디지아군과 충돌했다. 사건 당일 국경 지대인 레소마에서 “로디지아 군인들이 나타나 마을을 위협하고 있다”는 긴급 제보가 접수됐다. 보츠와나군 30여 명이 트럭을 타고 긴급 출동했다. 정찰을 마친 뒤 보츠와나군은 저녁 6시경 기지로 복귀하려 했다. 이때 로디지아군의 기습공격으로 순식간에 1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는 보츠와나에 말할 수 없는 큰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참사를 계기로 정부는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해 무장 수준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렸다. 국민들은 전사자 가족을 위한 성금을 모으며 조국 수호의 의지를 다졌다.

국회의사당 공원에는 레소마 사건 전사자 추모비가 별도 건립됐다. 오늘날에도 보츠와나는 매년 2월 27일을 국가 추모의 날로 지정해 전몰장병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최고의 명문 국립 보츠와나 대학 

독립은 했지만 보츠와나엔 번듯한 대학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인접국과의 연합대학에서 인재를 육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인종차별 등 학생들의 학습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이에 전 국민은 자체 대학 설립을 위해 대대적인 모금 활동을 시작했다. 아프리카의 많은 대학이 서구 강대국의 원조로 설립됐다. 반면 보츠와나 대학은 ‘국민 스스로 소를 팔아 만든 대학’으로 유명하다.

1982년 최초로 보츠와나 국립대학교가 문을 열었다. 캠퍼스 시설은 열악했지만 학생들의 활기는 넘쳐났다. 현지에서 나무 그늘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졸업을 앞둔 4학년생들을 만났다. 이 대학에도 한국인 교환학생이 있단다. 명문대학의 자부심이 넘쳤지만 취업 문제가 언급되자 금방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프리카 최고의 대학을 졸업해도 실업률이 30~40%에 달해 국내에선 취업할 곳이 없단다. 많은 졸업생이 북미·유럽으로 직장을 찾아 떠나고 있다고 했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