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화 -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
패션 잡지 기자서 미군 종군기자로
여성 제한 딛고 전쟁의 참혹함 기록
히틀러 욕조 사진으로 화제 일으켜
자신만의 길 걸어간 사진기자 실화
“우리는 저주받은 죽음의 수용소 안에 있는 그 방에 둘러앉았다. 아무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다하우가 승리의 소식을 듣기에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고 생각한다.”
마사 겔혼, ‘다하우, 죽음의 수용소’, 『나에게 거짓을 말하지 마라』, 존 필저 엮음, 히스토리아 펴냄
감독 : 엘런 쿠라스
출연 : 케이트 윈즐릿(리 밀러), 마리옹 코티야르(솔랑주 다이엔), 앤디 샘버그(데이비드 셔먼), 알렉산더 스카스가드(롤랜드 펜로즈), 앤드리아 라이즈보로(오드리 위더스)
카메라가 총보다 더 오래 기억된다
1944년 6월 6일 새벽 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을 향해 상륙정을 몰던 그 시각. 유럽 전역의 신문사와 통신사 편집국에서는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누가 먼저, 얼마나 정확하게, 그리고 얼마나 생생하게 이 역사적 순간을 전달하느냐의 전쟁. ‘D-데이’는 군사 작전인 동시에 역사상 가장 치열한 언론 전쟁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은 이전 전쟁과 달랐다. 1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영국 정부는 전장 사진 공개를 엄격히 통제했다. 전쟁의 참상이 알려지면 전쟁 지지 여론이 무너진다고 봤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은 언론을 통제하는 대신 활용하는 쪽을 택했다. 나치 독일의 선전과 맞서 싸우려면 자유 언론의 목소리가 필요했다. 종군기자 제도가 공식화됐고, 사진과 영상이 전쟁의 정당성을 전달하는 무기가 됐다. 미 육군은 공식 종군기자 자격증을 발급했다. 그러나 그 자격증은 남성에게만 쉽게 주어졌다. 여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 그러나 실제 이유는 더 단순했다. 전쟁은 남자들의 일이라는 편견이었다. 라이프는 예외적으로 마거릿 버크화이트를 전선에 보냈지만 이 역시 긴 싸움 끝에 얻어낸 것이었다.
전장에서의 정보 통제도 치열했다. 군 검열관들이 모든 사진과 기사를 검토했다. 아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내용, 전략적 정보가 담긴 내용, 너무 끔찍한 사진은 게재가 금지됐다. 미 육군은 1943년까지 아군 전사자 사진을 언론에 공개하지 않았다. 그러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입장을 바꿨다. 전쟁의 실제 희생을 보여줘야 채권 판매와 징병에 도움이 된다는 계산이었다. 조지 스트록이 찍은 미군 병사 세 명의 시신 사진이 1943년 9월 라이프에 게재됐다. 미국 내 전쟁 여론이 달라졌다. 그리고 1945년 봄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베를린을 향해 진격했고, 서쪽에서는 연합군이 라인강을 넘어 독일 내부로 밀려들었다. 진격의 경로마다 종군기자들이 따라붙었다.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수용소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이 렌즈 앞에 펼쳐졌다.
|
패션 잡지 기자가 전쟁 최전선에 선 이유
영화 ‘리 밀러: 카메라를 든 여자’는 1977년 노년의 리 밀러가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을 돌아보는 구조로 전개된다. 케이트 윈즐릿이 연기하는 리 밀러는 처음부터 전쟁 영웅이 아니다. 런던 공습을 찍으면서 전쟁 사진가로 조금씩 변해가는 과정이 영화의 첫 번째 축이다.
리 밀러가 영국 보그에서 일한다는 것은 제약이기도 하다. 패션 잡지 기자가 전쟁을 찍는다는 것에 군 당국은 회의적이었다. 보그 편집장 오드리 위더스(앤드리아 라이즈보로)는 처음부터 밀러를 지지한다. 전쟁 속에서도 잡지는 계속 발행돼야 했고, 그 잡지가 전쟁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녀의 신념이었다. 밀러의 사진은 전쟁터의 여성들, 간호사들, 공습 속에서 일상을 이어가는 런던 시민들을 담았다. 보그는 패션 화보 대신 전쟁 사진을 게재했다.
1942년 12월 밀러는 미군 공식 종군기자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전선 접근은 제한됐다. 그녀는 규정의 빈틈을 파고든다. 1944년 8월 생말로전투에서는 허가도 없이 전투 현장에 들어가 네이팜탄 사용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가 발각돼 일시 체포되고, 전선 출입이 금지됐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1945년 4월 29일 미군은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해방했다. 밀러는 그 당시 수용소 안에 들어간 기자들 중 한 명이다. 그녀가 찍은 사진들은 인류가 인류에게 가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 사진들이 보그에 실릴 때 편집장 오드리 위더스는 망설임 없이 게재를 결정했다.
1945년 7월호 제목은 ‘Believe I(믿어라)’
같은 날 밤 뮌헨에서 그녀는 히틀러의 아파트에 들어간다. 욕실로 걸어 들어가 옷을 벗고 욕조 안에 앉는다. 다하우의 진흙이 묻은 군화를 욕조 옆에 놓인 히틀러의 욕실 매트 위에 올려놓은 채로. 사진은 동행한 라이프 사진기자 데이비드 셔먼(앤디 샘버그)이 찍었다. 이 사진은 2차 세계대전을 상징하는 이미지 중 하나가 된다.
영화는 그 이후를 더 오래 들여다본다. 전쟁이 끝난 뒤 밀러는 얼마 후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아들은 어머니의 사진들을 다락방에서 발견하기 전까지 어머니가 종군기자였다는 것조차 몰랐다. 케이트 윈즐릿의 연기가 빛나는 것은 전쟁 장면이 아니라 그 이후의 모습이다. 기억을 지우려 술에 기대고, 공황을 겪으며,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것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였다는 것을 그 시대는 알지 못한다. 영화는 전쟁을 찍은 여자가 아니라 전쟁에 찍힌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리 밀러만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은 여성 기자들이 대규모로 공식 종군기자 자격을 얻어 전장을 기록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벽과 싸워야 했다. 여성은 전투 지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이었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규정을 비틀었다.
마사 겔혼은 D-데이 해변을 취재한 유일한 여성 기자로 기록된다. 겔혼은 간호사들을 취재한다고 둘러댄 후 병원선 화장실에 숨어들었다. 노르망디 해변에 발을 디딘 것은 그래서였다. 그녀가 쓴 기사는 총성이 아니라 부상병들의 신음으로 가득했다. 연합군이 보낸 공식 기사보다 더 생생하게 D-데이를 전했다. 발각된 뒤 미 육군으로부터 종군기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후 이탈리아 전선으로 가서 독자적으로 취재를 계속했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정식 허가를 받아 다른 배를 타고 전투를 지켜봤다. 두 사람이 이혼한 것은 그 이듬해 말이었다.
마거릿 버크화이트는 라이프의 창간 멤버이자 2차 세계대전 중 전투 현장 취재를 허락받은 최초의 여성이었다. 미국인 기자 최초로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현장을 렌즈에 담았다. 유럽을 공습하는 미군 폭격기에 탑승해 공중에서 전쟁을 찍었다. 1945년 4월 패튼 장군의 미군과 함께 부헨발트 수용소에 입성했다. 그녀가 찍은 수용소 생존자들의 사진은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세계에 처음 알린 이미지 중 하나였다. 6·25전쟁에도 종군기자로 참여했다. 이후 파킨슨병으로 쇠약해졌지만 카메라를 내려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하나다. 거부당할 때마다 다른 길을 찾았다는 것. 규정이 막으면 우회했고, 허가가 나지 않으면 허가 없이 갔다. 그들이 남긴 기록은 더 깊이 전쟁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리 밀러가 히틀러의 욕조에서 찍힌 사진처럼.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