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역사
① 국군의 군사역사 전통의 서막과 김구의 치하포 의거
② 의병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③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④ 시대를 앞선 대한민국 군대
⑤ 또 다른 독립전쟁, 의열활동과 그 기록
⑥ 국군의 군사교육으로 정예 국군 양성
⑦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
⑧ 광복과 함께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국권 침탈 후 임시정부 필요성 절감
경무국장으로 치열하게 활동 시작
1920년 3월 국군 편성 토대도 마련
만주 주둔한 독립군 군정서로 편제
국방일보는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를 맞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 김구의 독립활동과 국군의 군사역사 및 전통을 정리하는 연재기획을 총 8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군사역사에서 국군의 역사적 전통을 조망하면서 김구의 역할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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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이후 임시정부를 지킨 백범 김구
일제의 조작극이었던 ‘데라우치 총독 암살음모사건’으로 수감됐던 김구는 1915년 8월 인천 감리영에서 가출옥한다. 출옥 후 안악의 동산평 농장에서 농감으로 있으면서 농촌 개량운동에 전념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표출되자 김구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역사적인 국민이 주인되는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한 김구는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국호를 선정하고, 9월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하며 경무국장에 임명됐다.
일제는 개항기 이후 지속적으로 친일파를 포섭해 내부 분열을 조장하고, 조선·대한제국의 주요 애국지사를 공격하는 각종 공작을 강행했다. 불법적인 병합 이후에도 독립지사에 대한 감시와 체포를 위해 음모를 자행했다. 김구는 한민족 열망으로 대한민국이 선포되고 임시정부가 수립된 시점에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했다. 다른 임시정부의 요직을 마다하고 문지기를 청한 점은 김구의 독립에 대한 역할론을 가늠하게 한다. 일제 감시와 불법행위를 방지하고, 임시정부 요인을 보호하는 경무 활동이 중요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민족의 독립의지가 고양되고 독립 활동의 중심으로 역할하자 일제는 임시정부를 전방위 공격했다. 경무 활동이 없다면 임시정부의 독립활동은 결코 이뤄질 수 없었으며, 이는 독립전쟁에 기반이 됐다.
김구의 경무 활동은 매우 치열하게 전개됐다. 김구는 5년 동안 경무국장으로 활동하며 신문관, 검사, 판사로 집형(執刑)까지 했다. 범죄자에 대한 처분,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 자리잡은 임시정부에 대한 일본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가의 투항 유무를 정찰하며, 일본의 마수가 침입하는 것을 감시했다. 또한 프랑스 조계 당국과 협조해 체포된 독립지사를 석방시키는 활동까지 펼쳤다. 임시정부에 협조하는 한국인을 유도하고, 일본영사관에 매수된 한태규와 같은 밀정을 발본색원하고, 임시정부를 매도한 황학선을 적발한 경무 활동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프랑스 조계라는 공간의 위험성 속에서 일본의 정탐 및 공격에 대응하고, 내부 밀정을 찾아 처단하는 김구의 활동은 대한민국 독립전쟁의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지키는 독립 활동이었다.
한민족, 3·1운동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다
개항 이후 한국사는 근대화 물결 속에 혁신이라는 시대의 과제를 맞이했다. 오랜 시대 문제를 혁신하지 못한 조선은 외세 침략 속에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민족은 조일수호조규,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미사변, 대한제국 수립, 러일전쟁, 을사늑약, 병합이란 역사를 경험하며, 국권 회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민족은 동학농민혁명, 의병전쟁, 독립전쟁을 전개했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해산, 1909년 안중근의사의 하얼빈 의거 이후 1910년대 만주지역에 많은 독립단체를 결성하고, 한인촌을 바탕으로 독립기지를 건설해 체계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했다.
1919년 한민족은 ‘대한독립만세’를 당당하게 외치고 전 세계에 독립의 정당성을 알렸다. 1894년의 청일전쟁 이후 일제 강점에 맞서 독립 활동을 전개했지만 일본의 방해와 국권 침탈에 이익 관계가 맞았던 열강에 의해 결국 1910년 국권을 침탈당했다. 3·1운동은 독립에 대한 한민족의 열망을 반영하며, 국제사회에 대한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국민이 주인되는 대한민국을 세웠다. 대한민국은 강점 상황 속에서 임시정부를 수립해 독립 활동의 중심으로 역할하도록 했으며, 이후 독립군은 정당한 대한민국의 군대로서 일본군과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임시정부 수립과 대한민국의 군대, 독립군
국권을 침탈당한 상황에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한민족의 나라가 필요했으며, 이를 대표하는 정부조직과 정부의 실질적인 군대가 필요했다. 이에 3·1운동 이후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한민족의 독립 열망에 부응해 상하이의 임시정부 외에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한국인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보강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 여러 임시정부를 통합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을 국호로 정하고, ‘민주공화국’의 민주적 3권분립 정치체제를 확립했다. 대한민국은 한민족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고조선 이후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국의 역사를 경험하고, 개항 이후 격동기에 대한제국을 경험한 한민족에게 민국의 경험은 없었다. 한민족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국민의 나라를 세웠다.
한민족의 독립은 대한민국으로 독립이며, 한민족에게 자부심을 심어줬다. 또한 분산된 독립군에 독립전쟁의 국제적 기반을 마련했다. 임시정부는 독립군의 독립전쟁을 추진했다. 그 첫걸음은 임시정부의 군사편제를 갖추는 것이며, 기존 독립군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1920년 1월, 임시정부는 국무원 포고를 통해 “대한민국 2년(1920년)을 2000만 대한민족이 일심일체가 되어 죽느냐 자유냐의 독립대전쟁의 원년”이라 선포했다. 일본군을 적으로 독립전쟁의 책임을 위해 중국과 러시아령의 200만 동포가 독립전(獨立戰)의 군인이 돼야 하고, 2000만 동포가 독립전쟁의 군인이 돼야 함을 강조했다. 2월 26일, 임시정부 의정원은 ‘시정방침’을 의결해 독립전쟁 개전에 역량을 집중했다.
구체적으로 3월 16일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를 반포해 대한민국의 국군을 편성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는 육군의 구조, 기관, 계급, 직무 등 군사체계 전반을 규정했다. 독립군을 지휘했던 이동휘가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해 임시군제를 준비하고, 독립군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했다. 현실적으로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는 만주에 주둔한 독립군을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정규군, 즉 군정서(軍政署)로 편제했다. 그 결과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가 편제됐다.
임시정부의 군대, 독립전쟁의 길을 열다
국군의 군사역사에서 병합 이전에 한국민은 의병전쟁의 전통을 지녔다. 군대해산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독립군으로 전환되면서 보다 체계적인 독립군의 독립전쟁이 펼쳐졌다. 이 전환 과정에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은 국권 강탈의 원흉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사할린에서 처단했으며, 많은 독립지사가 만주에서 한인촌을 건설하고 군사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했다.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이 세워지고, 임시정부가 수립돼 독립군은 당당히 대한민국 군대로 독립전쟁의 역사를 열었다.
김구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을 세우는 데 기여하고, 수립된 임시정부를 일본의 탄압으로부터 지켜 독립전쟁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의병전쟁에서 대한민국의 독립군으로 독립전쟁을 전개해 결정적인 전과를 거뒀다. 대한민국의 군대, 독립군은 당당히 독립전쟁에 임해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전과를 거뒀다. 국군의 역사에서 이런 전과는 3·1운동으로 표출된 한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선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사와 국군의 군사역사에서 임시정부의 수립과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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