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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등 뒤 생활관이 조용해지는 시간이 있다. 옆에는 전우가 누워 있고, 온종일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냈는데도 문득 가슴 한쪽이 서늘해지는 밤이 있다. 사람이 없어 외로운 것만은 아니다. 사람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경험한다.
‘외로움’과 ‘고독’은 비슷해 보이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어에서도 보통 ‘loneliness’는 혼자란 사실이 고통으로 다가오는 상태를, ‘solitude’는 스스로 받아들이거나 선택한 홀로 있음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구분해 쓴다. 신학자 폴 틸리히도 이 둘의 차이에 주목한 바 있는데, 혼자 있는 시간이 모두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다.
외로움은 이제 개인의 기분만으로 치부할 문제는 아니다. 영국은 2018년 외로움 문제를 범정부적으로 다룰 장관급 책임자를 지정했고, 일본도 고독·고립 문제를 국가 정책으로 다루기 시작했으며, 세계보건기구(WHO) 역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을 중요한 국제보건 문제로 보고 있다. 외로움이 오래 이어지면 마음뿐 아니라 건강과 일상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시간 자체를 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과 홀로 있음은 같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람들 사이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이 필요하다. 건강한 고독은 그렇게 자신에게 ‘회귀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1665년 페스트로 케임브리지가 문을 닫자 젊은 뉴턴은 고향으로 돌아갔다. 뜻하지 않게 학교를 떠나보내게 된 시기에 그는 미적분과 빛, 중력에 관한 생각을 깊이 밀고 나갔다. 고립 자체가 위대한 발견을 만든 것은 아니다. 예기치 않게 생긴 시간을 자기 생각으로 채웠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혼자 있게 됐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가에 있다.
정신분석학자 도널드 위니컷은 ‘혼자 있을 수 있는 능력’을 이야기했다. 흥미로운 건 이 능력이 완전히 혼자 버려진 경험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믿을 만한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안정감 속에서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도 견딜 수 있게 된다. 전우가 곁에 있다는 든든함 속에서 잠시 말없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시간도 의미가 있다.
스마트폰을 들고 혼자 있다고 저절로 고독의 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일과가 끝나자마자 화면을 켜고, 계속 다른 사람의 삶을 들여다보고, 끊임없이 알림에 반응하다 보면 정작 자기 생각이 들어올 자리는 좁아진다. 잠깐의 정적조차 어색해 무언가를 보고 듣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혼자 있는 힘 역시 어느 정도 연습이 필요한 이유다.
하루 10분이면 어떨까. 일과 후나 취침 전 잠시 화면을 내려놓고 오늘 하루를 천천히 되짚어 보는 것이다. “오늘 어떤 사람이었는가?” “오늘 가장 마음에 남은 일은 무엇인가?” “지금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가?” 정도면 충분하다. 답을 반드시 찾아낼 필요도 없다. 자신의 마음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그 시간은 의미를 갖는다.
모든 외로움을 혼자 견뎌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마음이 계속 가라앉거나 잠을 이루기 어렵고, 일상과 복무를 감당하기 버거워진다면 누군가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곁의 전우나 간부, 병영생활전문상담관에게 마음을 꺼내 놓을 수도 있고, 국방헬프콜 같은 도움의 통로를 찾을 수도 있다. 말로 꺼내는 것은 약함의 표시가 아니라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마음을 사람과 나누는 일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혼자 있어야 할 때와 혼자 있어선 안 될 때를 모두 만난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무조건 견디는 힘이 아니라 그 둘을 구별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견디기 힘든 외로움은 사람과 나누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고독은 천천히 익혀 가는 것. 어쩌면 성숙은 그렇게 사람에게 다가갈 때와 자신에게 돌아올 때를 알아 가는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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