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대륙 향한 작은 문, 나서는 순간 지옥으로…

입력 2026. 08. 28   14:33
업데이트 2026. 08. 30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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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갈 고레섬…대서양 노예무역의 비극을 품다

길이 900m·폭 300m의 작은 섬에
프랑스식 건물 노예무역 역사 증언

유럽 상인·관리 생활한 2층과 달리
1층은 출항 전 노예 대기하던 감옥
건물 뒤편 출입문 나서 노예선 올라

공중에서 촬영한 고레섬 전경. 필자 제공
공중에서 촬영한 고레섬 전경. 필자 제공


1990년 6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민주화 지도자 넬슨 만델라가 세네갈 수도 다카르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고레를 찾았다. 27년간 옥살이 끝에 자유를 되찾은 그는 이곳에 있는 ‘노예의 집’을 천천히 둘러봤다. 건물 뒤편의 바다로 통하는 좁은 문 앞에서 그는 눈물을 머금은 채 아무런 말 없이 한동안 서 있었다. 1992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이곳을 방문해 노예무역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역사적 책임을 언급하며 세계인에게 화해와 용서를 호소했다. 이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도 이곳을 찾았다. 면적이 불과 0.18㎢에 지나지 않는 이 섬은 197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약 400년에 걸친 대서양 노예무역을 가장 강렬하게 증언하는 상징적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15세기 후반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동서 교역로를 장악하면서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바닷길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러한 해양 진출은 새로운 교역의 시대와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강제 이주의 문을 열었다. 1492년 콜럼버스의 항해 이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메리카 대륙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카리브해와 브라질에서는 사탕수수 농장이 급속히 늘어났고, 멕시코·페루에서는 은광·금광 개발이 붐을 이뤘다.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지만 원주민들은 가혹한 노동과 유럽에서 전파된 각종 전염병으로 급감했다.

식민지 경제 유지를 위한 새로운 노동력이 필요해지자 유럽인들의 시선은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미 서아프리카에서는 부족 간 전쟁을 통해 포로를 교환하거나 노예로 삼는 관행이 존재했다. 유럽 상인들은 이러한 지역 질서를 자신들의 세계 무역망 속으로 편입시켰다. 총기와 화약, 직물, 금속 제품 등을 제공하는 대신 노예를 사들이는 거래가 이뤄졌다. 노예는 이내 가장 수익성이 높은 상품이 됐다.

이처럼 인간의 생명을 거래하는 국제적 상업망인 대서양 ‘삼각무역’ 구조가 등장했다. 유럽에서 출항한 배는 총기와 화약, 면직물, 술 등을 싣고 아프리카로 향했다. 이 물품들은 현지 부족장이나 상인들에게 전달됐고, 그 대가로 아프리카인 노예가 건네졌다. 이후 이들을 실은 배는 대서양을 건너 브라질과 카리브해,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노예들은 사탕수수·담배·목화 농장과 광산에서 혹독한 노동에 투입됐다. 마지막으로 설탕과 커피, 면화, 럼주, 담배와 같은 식민지 생산물을 싣고 유럽으로 돌아가는 순환 구조가 완성됐다.

삼각무역 시스템 아래 유럽은 번영을 누렸지만, 이는 수많은 아프리카인의 희생 위에서 얻은 것이었다. 가장 참혹했던 과정은 노예선이 대서양을 횡단할 때였다.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인 채 선창 바닥에 서로 몸을 맞댄 상태로 누워 있어야 했다. 성인 남성 한 사람이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은 겨우 관(棺)하나 크기 정도에 불과했다. 몸을 제대로 돌릴 수도 없었고, 배설물과 오물이 선창을 뒤덮었다. 더위와 습기 속에서 천연두·이질·괴혈병이 번진 탓에 항해 도중 10~20%가 목숨을 잃었다. 질병으로 죽은 사람들은 아무런 장례 절차도 없이 그대로 바다에 던져졌다. 그렇게 약 1250만 명이 대서양을 건넜고, 이 가운데 1070만 명 정도가 살아서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그 중심지가 왜 하필 고레섬이었을까? 이 거대한 국제 노예무역에서 길이 약 900m, 폭 약 300m에 불과한 작은 화산섬인 고레가 부각된 것은 뛰어난 지리적 여건 때문이었다. 이곳은 단순한 섬이 아니라 대서양 항로를 통제하고, 서아프리카 무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략 거점으로 최적이었다. 고레 섬은 아프리카 대륙 최서단인 베르데곶 앞바다 약 3㎞ 지점에 있다. 유럽에서 출항한 범선은 북대서양의 무역풍과 카나리아 해류를 따라 남하한 뒤 이곳에서 가장 먼저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었다. 반대로 브라질과 카리브해로 향하는 선박 역시 적도 해류를 타기 전에 이곳에서 식수·식량을 보급하고 선박을 정비했다. 또한 세네갈강과 감비아강 유역을 가로질러 서아프리카 내륙과 연결되는 교역망이 잘 발달했기 때문에 내륙에서 끌려온 노예들을 집결시키는 데에도 유리했다.

이런 전략적 가치는 곧 유럽 열강의 치열한 경쟁을 불러왔다. 15세기에는 포르투갈이 가장 먼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1588년 이후에는 네덜란드가 포르투갈 세력을 밀어내고 섬을 점령했다. 네덜란드는 이 섬을 ‘호레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고레’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서아프리카에서도 이 섬을 차지하기 위해 해군을 동원했다. 특히 18세기 7년 전쟁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점령과 탈환이 반복됐다. 결국 1815년 이후 프랑스가 이 섬을 최종적으로 확보했다.

고레 섬에서 가장 상징적인 건축물은 ‘노예의 집’이다. 우아한 정면에 붉은 벽과 흰색 난간, 2층으로 이어지는 곡선형 계단은 당시 프랑스 식민지 시대 저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쉽게도 이러한 아름다운 외관은 건물 내부의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2층은 유럽인 상인과 관리의 생활공간으로, 이곳에서는 무역 상담과 계약이 이뤄졌다. 반면 1층은 철저하게 노예를 관리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좁은 감방은 성인 남성, 여성, 어린이 등으로 구분돼 있었다. 각 방은 창문이 거의 없고 천장이 낮아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았다. 수십 명이 한 방에 갇혀 출항을 기다려야 했기에 움직일 공간조차 부족했다.

고레섬 ‘노예의 집’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문’. 필자 제공
고레섬 ‘노예의 집’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문’. 필자 제공


노예의 집에서 가장 많은 방문객이 발길을 멈추는 곳은 건물 뒤편의 작은 출입문이다. 폭이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인 이 문은 곧바로 대서양을 향해 열려 있다. 노예들은 이 문을 통과해 작은 보트에 오른 뒤 앞바다에 정박한 노예선으로 옮겨졌다. 그 순간부터 가족과 고향은 영원히 과거가 됐다. 이 문은 출입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정체성과 자유를 모두 앗아가는 일종의 지옥문인 셈이었다.

고레 섬은 노예를 가두어 두는 장소만은 아니었다. 섬 전체는 하나의 조직적인 국제 무역기지이자 요새처럼 설계돼 있었다. 섬 중앙에는 상인들의 저택과 행정시설이 들어섰고, 가톨릭 성당과 군 병영도 설치됐다. 가장 높은 언덕에는 요새와 포대가 구축됐다. 이곳에서는 다카르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을 감시하고 경쟁국 함대의 접근에 대비했다. 서구 열강이 경쟁적으로 이 섬을 차지하려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군사적 가치 때문이었다.

오늘날 고레 섬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존엄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경고하는 역사 교과서다. 이 작은 섬을 찾는 사람들은 과거를 기억하는 일이 곧 미래를 지키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이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유도 이러한 비극이 재현돼선 안 된다는 인류 공동의 다짐을 후세에 전하기 위함이리라.


필자 이내주는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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