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 스카이폴’과 ‘전함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 

입력 2026. 08. 27   15:21
업데이트 2026. 08. 27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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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영웅의 퇴장, 그리고 새로운 시대의 출항
사라지는 것과 다가오는 것 사이

영화 속 미술 >> ‘007 스카이폴’과 ‘전함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앞
나란히 앉은 제임스 본드와 신입 무기 담당관 Q
작은 증기선에 이끌려 조선소로 향하는 노쇠한 전함
총알보다 강력한 정보화 시대 마주한 본드와 닮아
변화 받아들이며 과거의 유산 지켜내는 법을 묻다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임스 본드와 Q. ‘007 스카이폴’ 스틸컷.
영화 ‘007 스카이폴’에서 영국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전시된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임스 본드와 Q. ‘007 스카이폴’ 스틸컷.



영화 ‘007시리즈’는 첩보영화의 대명사다. 1962년 첫 번째 작품 이후 지금까지 25편이 제작됐고, 주인공인 영국 비밀정보국 요원 제임스 본드는 세계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를 누비는 거대한 스케일, 시원한 액션, 최첨단 장비와 폭발이 난무하는 스펙터클은 오랫동안 007시리즈의 상징이었다.

화려한 오락영화로 기억되는 007시리즈에도 의외로 미술 작품이 등장하는 순간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23번째 작품인 ‘007 스카이폴’(2012)이다. 기존의 007 영화가 대체로 영국과 서방 세계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과 맞서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스카이폴은 시선을 조직 내부로 돌린다. 전통 사이에서 흔들리는 정보국, 세대교체의 위기 앞에서 제임스 본드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다. 오락보다 성찰과 철학을 택한 이 편에서 미술은 그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튀르키예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본드는 동료의 오인 사격으로 현장에서 사라진 인물이 된다. 그러나 정보국 본부가 공격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복귀를 자청한다. 조직을 공격한 인물은 과거 정보국 요원이자 천재적인 해커였던 실바. 그는 정보국 수장 M에게 버림받았다는 원한을 품고 조직 전체를 무너뜨리려 한다. ‘스카이폴’은 007시리즈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제작됐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사이버 테러와 디지털 전쟁을 앞세운 실바에 맞서 총과 칼, 몸으로 싸우는 본드를 내세운다. 이것은 ‘50년의 역사를 걸어 온 007이 새로운 시대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하다.

실바를 만나러 떠나기 전 본드는 정보국의 신입 무기 담당관 Q에게 장비를 받는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장소는 런던 내셔널갤러리다. 영국을 대표하는 국립미술관이자 세계 최고의 회화 컬렉션을 소장한 이 공간이 선택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영국 영화의 아이콘이 된 007시리즈가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 작품에서 영국 문화를 대표하는 장소를 무대로 삼은 것이다. 영화에는 애스턴 마틴 DB5를 비롯해 초기 007시리즈를 상징했던 클래식한 소품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한동안 할리우드식 블록버스터의 문법을 따르던 시리즈가 이번만큼은 가장 영국적인 방식으로 돌아왔음을 보여준다.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 1839년, 캔버스에 유채, 90.7x121.6㎝,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윌리엄 터너, '전함 테메레르호의 마지막 항해', 1839년, 캔버스에 유채, 90.7x121.6㎝, 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

 

본드와 Q가 마주 앉은 작품은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1839)다. 해질 무렵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한 척의 거대한 전함이 바다에 떠 있다. 영국 해군의 영광을 상징했던 테메레르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 함대를 격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전설적인 군함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 전함은 수명을 다해 조선소로 예인된다. 터너는 실제로 이 장면을 목격했고, 마지막 항해를 떠나는 전함에 경의를 표하듯 이 그림을 남겼다.

이 작품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전함을 끌고 가는 작은 증기 예인선이다. 검은 연기를 뿜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예인선은 19세기 산업혁명이 이끄는 새로운 시대를 의미한다. 시대의 영웅이었던 범선은 뒤로 물러나고 증기기관이 이끄는 근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터너는 한 폭의 풍경 속에 사라져가는 영광과 다가오는 미래를 동시에 담아냈다. 이 그림은 ‘스카이폴’의 인물과도 절묘하게 겹친다. 신입 Q가 앳된 모습으로 등장하자 본드는 ‘애송이’처럼 보이는 그의 능력을 의심한다. 그러자 Q는 이렇게 말한다. “잠옷 차림에 노트북 하나만 있어도 요원님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총과 칼 없이도 전쟁을 수행하는 시대. 정보는 총알보다 강력한 무기가 됐다. 세대교체의 위기를 느끼는 것은 본드만이 아니다. 정보국의 수장 M 역시 청문회에서 정보국의 존재 이유를 추궁당한다. 냉전 시대 서방 세계를 지켜온 전설적인 정보국은 이제 디지털 시대에 뒤처진 구시대 조직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터너의 그림에 등장하는 테메레르함은 구시대의 영웅인 본드이자 낡은 정보국이며, 한 시대를 이끈 영국을 은유한다. 반면 작은 증기선은 신입 Q와 디지털 기술, 새로운 시대를 나타낸다.

그러나 ‘스카이폴’은 도래한 시대를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터너가 전함의 마지막 항해를 장엄하게 그렸듯 영화에서도 사라져가는 것의 가치를 끝까지 붙든다. Q는 컴퓨터가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라도 현장에서 내리는 인간의 판단까지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본드는 첨단기술보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 예전 방식으로 싸우는 길을 선택한다.

‘스카이폴’은 과거와 미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보다 변화 속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묻는다. 터너의 그림을 다시 보면 화면 오른편에는 붉은 태양이 저물고, 왼편에는 하늘에 희미한 초승달이 떠오른다. 그림 속에는 지는 태양과 떠오르는 달이 공존한다. 황혼은 끝이면서 동시에 시작이다. 50주년을 맞은 007시리즈가 터너의 그림 앞에서 멈춰 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새로운 시대는 피할 수 없지만 미래는 과거를 완전히 지우는 방식으로 오지 않는다. 변화를 받아들이면서 과거로부터 이어진 유산을 지키는 것. 영화와 그림,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필자 김유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배움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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