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에 기대어 고요를 거닐다

입력 2026. 08. 27   16:30
업데이트 2026. 08. 27   16:44
0 댓글

내키는 대로, 닿는 대로 - 완주 소양 오성한옥마을 

고창·무안 등 헐릴 위기 놓였던 100~200년 옛집들, 장인 손길로 되살아나 산골짜기에 한데 모여
현대건축과 어우러진 ‘아원’, 조선시대 모습 간직한 ‘소양고택’…화보·드라마 촬영지로도 이름나
위봉폭포 물줄기, 송광사 천년 풍경은 덤…늦더위 지친 몸과 마음, 서늘한 한옥 마루에 누워 쉬어볼까


달력이 8월의 끝을 향해 간다. 한낮 더위는 여전해도 아침저녁 공기엔 서늘한 기운이 섞이기 시작했다. 계절이 바뀌는 이런 틈에는 산골이 좋다. 여름이 남긴 피로를 가라앉히기에 한옥 마루만 한 자리도 드물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소양면 위봉산과 서방산, 종남산이 겹겹이 두른 골짜기에 한옥 23채가 모여 있다. 오성한옥마을이다. 경북 안동하회마을 같은 수백 년 집성촌은 아니다. 2012년부터 주민들이 집을 짓고 고치며 가꾼 동네다. 그저 조용한 동네였을 뿐인데 심상치 않다. 지난해에는 2025~2026 한국관광 100선에 들었고, 이제는 한 해 70만 명이 다녀간단다. 

이곳에 들어선 집들의 이력이 만만치 않다. 출신지가 제각각이어서다. 경남 진주에서, 전북 정읍에서, 전북 고창과 전남 무안에서 헐릴 위기에 놓였던 고택들이 기둥과 서까래째 해체돼 이 골짜기로 옮겨 왔다. 한옥은 못을 쓰지 않아 해체한 뒤 다시 짜맞출 수 있다는 점을 활용했다. 그렇게 옮겨 온 집이 6채, 새로 지은 집이 14채, 살던 집을 고친 것이 3채다. 전국의 옛집들이 완주 산골에서 두 번째 삶을 사는 셈이다.

마을의 진가를 카메라가 먼저 알아봤다. 방탄소년단(BTS)이 여름 화보집 ‘2019 BTS 서머 패키지(SUMMER PACKAGE)’를 이 일대에서 찍었다. 올봄 종영한 드라마 ‘21세기 대군부인’의 주요 장면도 여기서 촬영됐다. 방송이 끝난 뒤 촬영지를 찾는 여행객이 부쩍 늘었다. 마을에서 시작해 산성과 폭포를 지나 천년고찰에서 마치는 하루를 그려 보자.


수면 위에 홀로 선 나무 오성제

마을 초입의 저수지 오성제에서 여정이 시작된다. 잔잔한 수면가에 소나무 한 그루가 홀로 서 있다. BTS 화보에 등장한 뒤 ‘BTS 소나무’라는 별명을 얻은 나무로, 일본에서 단체로 찾아온 팬도 적지 않았다. ‘21세기 대군부인’에서 두 주인공의 감정이 깊어지는 장면도 이 물가에서 나왔다. 이른 아침이면 물안개가 골짜기를 채우고 해 질 무렵이면 사진을 찍으려는 이들이 제방에 줄을 선다. 저수지를 뒤로하고 골목으로 올라서면 담장 너머로 기와지붕이 이어진다. 마을 뒤편 문화생태숲은 문화관광해설사와 함께 걷는 예약제 숲길이다. 체험관에선 주민들이 여는 다도체험도 신청할 수 있다.

 

화보·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아원고택에서 바라본 완주의 풍경.
화보·드라마로 널리 알려진 아원고택에서 바라본 완주의 풍경.


250년을 건너온 4채의 집 아원

마을 언덕에는 아원이 있다. ‘우리 모두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고택과 현대건축을 한 울타리에 들인 복합문화공간이다. 입구는 뜻밖에도 노출 콘크리트 건물이다. 이이남 작가의 미디어아트가 방문객을 맞고 콘크리트 벽에 뚫린 작은 문 뒤로 좁은 회랑이 이어진다. 회랑 끝 전시실은 한 번에 단 한 점의 작품만 건다. 천장 틈으로 스민 빛이 작은 연못 위에서 부서지며 전시실 자체를 작품처럼 보이게 한다.

갤러리 뒤 대나무숲 오솔길을 오르면 비로소 고택 마당이다. 아원의 한옥 4채는 저마다 고향이 다르다. 안채와 사랑채는 250년 전 진주에서 지은 집이고 대청이 시원한 천지인은 정읍에서, 서당 건물은 전남 함평에서 옮겨 왔다. 3면을 활짝 연 천지인 마루에 앉으면 종남산 능선이 눈앞에 걸린다. 드라마에서 시간이 넘나드는 장면도 이 마당에서 찍었다. BTS는 촬영기간 일주일을 이 집에서 머물렀다. 4채 모두 숙소로 쓰이지만 낮시간대에는 일반 관람객에게도 마루를 연다.


고창·무안 등의 고택을 옮겨 와 다시 세운 소양고택.
고창·무안 등의 고택을 옮겨 와 다시 세운 소양고택.

 

소양고택 인근 카페 ‘두베’.
소양고택 인근 카페 ‘두베’.


장인의 손으로 되살린 옛집 소양고택

아원 아래쪽 소양고택의 내력도 비슷하다. 고창과 무안 등지에서 철거될 뻔한 100~200년 된 고택을 해체해 옮겨 온 뒤 문화유산 장인들의 손을 거쳐 다시 세웠다. 현대건축을 곁에 둔 아원과 달리 이쪽은 전통의 결을 지키는 데 공을 들였다. 처마 선이며 비워 둔 마당이며 옛 모습 그대로다. 드라마에서 주인공의 집으로 나온 여일루도 이곳에 있어 그 장면을 기억하는 이들이 일부러 찾아온다. 혜온당을 비롯한 6채가 숙소로 쓰이며 요즘은 한복을 빌려 입고 마당을 거니는 방문객도 심심찮게 보인다.

고택 곁에는 완주의 첫 독립서점인 ‘플리커 책방’이 있다. 하루 전까지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방문객이 몰리지 않아 한옥의 고요 속에서 책을 고르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함께 운영하는 카페 ‘두베’는 통창 너머로 종남산 자락과 산허리를 감는 운무를 보여 준다. 1층에 놓인 수제 진공관 앰프와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래 앉아 있게 되는 자리다. 여름 수국과 가을 단풍이 차례로 정원을 채우는 마을의 대표적인 쉼터이기도 하다.


누에 치던 집의 변신 오스갤러리

마을 바깥 저수지 앞에는 오스갤러리가 있다. 한때 누에를 치던 잠사 건물을 고치고 노출 콘크리트 전시동을 덧붙여 미술관과 카페로 꾸몄다. 붉은 벽돌 카페와 잿빛 갤러리가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모습부터 이국적이다. 실내는 일부러 조도를 낮췄다. 통유리 너머 계단식 정원이 한 폭의 그림처럼 도드라지는 이유다. 궁궐 후원의 화계를 닮은 정원을 바라보며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이 집의 백미다.


오성한옥마을 인근에 세워진 위봉산성의 흔적.
오성한옥마을 인근에 세워진 위봉산성의 흔적.


어진을 지키던 산속 돌담 위봉산성과 위봉사

마을을 벗어나 위봉산 고갯길을 오른다. 고갯마루의 위봉산성은 조선 숙종 원년인 1675년부터 8년에 걸쳐 쌓은 성으로, 사적으로 지정돼 있다. 성벽 둘레만 약 8.5㎞에 이른다. 용도가 특이하다. 전쟁을 치르려는 성이 아니라 유사시 전북 전주 경기전에 모신 태조 어진과 위패를 옮겨 와 보호하려고 쌓은 성이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차지했을 때는 어진이 이곳까지 피란 오기도 했다. 고갯마루에 남은 서문지는 화보 촬영지로 알려진 뒤 팬들의 순례지가 됐다. 돌담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려는 발길이 지금도 이어진다.

성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서면 위봉사가 나온다. 백제 무왕 5년인 604년에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오래된 절이다. 조선 후기에는 산성과 행궁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던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사찰이었다. 17세기 건물로 추정되는 보광명전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차분히 경내를 한 바퀴 도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 산성과 묶어 들르기 알맞다.


완산 팔경의 물줄기 위봉폭포

위봉사를 나와 고개를 마저 넘으면 위봉폭포다. 60m 높이에서 두 단으로 꺾여 쏟아지는 물줄기가 예로부터 완산 팔경의 하나로 꼽혔다. 2021년에는 일대가 명승으로 지정됐다. 판소리 명창 권삼득이 이 폭포 아래서 소리를 닦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갯마루 정자에서 전체를 조망해도 좋고, 위봉터널 너머 전망대로 가면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굵은 비가 지나간 직후 수량이 가장 넉넉하니 물소리가 우렁찬 여름이 바로 제철이다. 벼랑과 원시림 사이로 날리는 물보라 앞에 서면 더위가 한풀 꺾인다.


종남산 아래 세워진 천년고찰 송광사의 십자형 종루.
종남산 아래 세워진 천년고찰 송광사의 십자형 종루.


조선에 하나뿐인 십자형 종루 송광사

여정의 마지막은 종남산 아래 송광사다. 867년 창건됐다고 전해지는 천년고찰로 산중이 아닌 평지에 가람을 앉힌 점부터 눈길을 끈다. 대웅전과 종루, 소조사천왕상,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까지 보물만 넷을 품었다. 대웅전의 삼불좌상은 병자호란 뒤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1641년에 만든 불상이다. 천왕문의 소조사천왕상은 흙으로 빚은 사천왕상으로는 손꼽히는 규모로, 부릅뜬 눈이 지금도 생생하다.

종루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열십자 모양이 되는 2층 누각으로, 이런 평면을 가진 조선시대 건물은 여기 하나뿐이다. 다만 지금은 해체 보수공사 중이어서 모습을 볼 수 없다. 당일형과 휴식형 템플스테이도 운영한다. 보수를 마친 종루와 봄의 벚꽃 터널은 다시 올 이유로 남겨 두자.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필자 김정흠은 여행작가이자 콘텐츠 크리에이터다. 주로 여행 카테고리의 콘텐츠를 기획·제작하고 있다. 국내외 여행 매체 등과 함께 다채로운 여행 콘텐츠를 선보인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