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항행시대의 종말과 과제
① 위협받는 자유항행
② 떠오르는 새로운 항로
③ 전문가 인터뷰
남방항로보다 거리 35% 줄지만 계절·러 의존 변수도…
파도는 높지만 넘어야 할 ‘선택지’
‘팬스타 아크로호’ 출항 상업적 가능성 첫 시험
최단거리보다 운항 ‘항상성’이 물류 최고 관건
얼음 해역 대비 선체·장비·보험…비용에 영향
핵심 구간 ‘러 관리’ 아래…지정학적 리스크도
기존 항로 대체보다 ‘공급망 선택지 확보’ 의미
글로벌 공급망을 받치는 해상 대동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양의 자유’가 당연시되던 시대가 저물고 해상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센 파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무역의 대부분을 해상 운송에 의존하는 한국에 자유항행의 위협은 국가 경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국방일보는 위협받는 자유항행시대의 문제를 조명하고 그 대안을 찾아보는 특별기획을 26일부터 3일간 게재합니다.
호르무즈해협과 바브엘만데브해협 등 세계 주요 해상 길목의 불안이 이어지면서 특정 항로에 집중된 글로벌 물류망의 취약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특히 홍해와 수에즈운하를 거치는 아시아~유럽 남방항로의 대체·보완 경로 가운데 하나로 북극항로가 주목받고 있다. 북극해를 새로운 유럽~아시아 물류축으로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구체화하는 모습이다. 다만 계절성과 비용, 러시아 의존 등 넘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시아~유럽 잇는 북극항로…상업운항 본격 시험대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이용해 아시아와 유럽 등을 잇는 항로를 말한다. 이 가운데 현재 상업적 활용이 가장 활발한 것은 러시아 북극 연안을 지나는 북동항로이며, 핵심 구간이 북극해항로다. 동북아와 북유럽을 오갈 경우 수에즈운하를 거치는 남방항로보다 거리를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북극항로의 주요 매력 가운데 하나는 운송거리 단축에 따른 경제성이다. 해양수산부에 따르면 북동항로를 이용한 부산~네덜란드 로테르담 구간은 약 1만3000㎞다. 수에즈운하를 경유하는 기존 항로가 약 2만㎞인 점을 고려하면 운항거리를 약 35% 줄일 수 있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 분석에 따르면 부산~로테르담을 운항하는 7만8000톤급 선박의 1회 운항비용은 수에즈운하 항로가 383만3001달러, 북극항로는 하절기 기준 300만2725달러로 추산됐다. 북극항로를 이용할 경우 약 22% 낮아지는 셈이다. EY한영도 부산~로테르담 구간을 가정해 북극항로 운임이 수에즈 항로보다 약 33% 낮아질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 북극항로는 이미 러시아산 에너지 운송을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러시아는 북극권에서 생산되는 원유와 LNG를 아시아에 수출하는 데 북극항로를 이용하고 있다. 외신에 따르면 올해 북극항로 운항 시즌 초반에만 러시아산 원유 약 600만 배럴을 실은 7척의 선박이 아시아로 향했다. 이는 지난해 전체 시즌 북극항로를 통해 운송된 원유 물량의 절반에 가까운 규모다.
중국 컨테이너 선사 ‘씨레전드’는 중국 닝보와 영국 펠릭스토를 잇는 북극항로를 처음으로 정기 운항하기 시작했다. 해당 선사는 이 항로를 ‘빙상 실크로드’로 이름 붙였다. 기존 항로 소요 시간 40일을 절반가량 줄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우리나라도 북극항로의 상업적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다. 2758TEU(1TEU=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팬스타 아크로호’는 22일 부산신항을 출항해 우리나라 최초의 북동항로 컨테이너선 시범운항에 들어갔다. 팬스타 아크로호는 북동항로를 거쳐 영국 펠릭스토,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그단스크를 차례로 기항한 뒤 다시 북동항로를 통해 부산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전체 예상 운항 기간은 45일이다. 출항 당시 화학제품과 중고차, 자동차부품 등 수출화물 737TEU와 공컨테이너 202TEU 등 모두 939TEU를 실었다. 귀항 때는 공컨테이너 1300TEU와 수입화물 등을 싣고 올 예정이다.
계절성·비용·안전 인프라…상시 항로까지 과제
다만 운항 거리가 짧다는 이유만으로 북극항로가 곧바로 수에즈 항로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해빙과 기상, 선박과 보험, 안전 인프라부터 러시아 의존이라는 지정학적 변수까지 넘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가장 큰 현실적 제약은 ‘언제나 같은 시간에 갈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컨테이너 정기선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최단 거리만이 아니다. 정해진 날짜에 출항해 예정된 시간에 화물을 인도할 수 있어야 한다. 북극에서는 해빙 분포와 두께, 기상 등에 따라 항로와 선박 속도가 달라질 수 있어 이런 조건을 맞추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
비용도 단순한 거리 계산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얼음이 존재하는 해역을 운항하려면 운항 조건에 맞는 선체와 장비가 필요하다. 경우에 따라 쇄빙선 지원을 받아야 한다. 보험 역시 변수가 된다. 보험업계는 얼음 상태와 선박 설계, 선원의 운항 경험 등을 평가해 북극과 같은 조건부 운항 해역에 추가 보험료나 별도의 안전조건을 적용할 수 있다. 결국 항해 거리가 짧아져 연료비를 줄이더라도 선박 투자비와 쇄빙 지원, 보험과 운항 지연 비용 등이 더해지면 실제 경제성은 달라질 수 있다.
사고가 발생했을 때의 대응 여건도 기존 주요 항로와 차이가 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극지해역의 악천후와 정확한 해도·통신체계·항해지원시설의 상대적 부족, 지리적 원격성 등을 운항의 고유한 위험 요인으로 꼽고 있다. 특히 사고가 발생할 경우 원격성 때문에 구조나 오염 정화 작업이 어렵고 비용도 커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북극이사회 역시 혹독한 환경과 제한된 기반시설이 사고 위험과 영향을 키우고 대응 활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지적한다.
이 때문에 극지 운항에는 일반 해역보다 강화된 국제 기준이 적용된다. IMO의 ‘극지선박규정’은 선박의 설계·구조·장비뿐만 아니라 운항, 항해계획, 승무원 배치·훈련, 수색·구조, 오염 방지 등을 포괄한다. 극지 해역을 운항하려는 적용 대상 선박에는 예상 운항조건과 위험에 대한 평가를 거쳐 ‘극지선박증서’가 요구된다. 북극항로의 상업화에 선박뿐 아니라 훈련된 인력과 운항·안전관리 체계가 함께 필요하다는 뜻이다.
북극해항로 쥔 러시아…제재·인프라 의존 변수
다른 변수는 러시아다. 북동항로의 러시아 연안 핵심 구간인 북극해항로는 러시아의 관리체계 아래 운영된다. 러시아 측 북극항로 관리체계는 이 구간 운항을 위한 허가 신청과 쇄빙선 지원, 빙해 도선 등에 관한 절차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해빙이 많은 시기에 안정적으로 항해하려면 러시아의 항행지원 인프라가 중요한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 국영기업 로사톰도 원자력 쇄빙선단 확충을 북극항로 개발의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대러 제재가 계속 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 4월 제20차 대러 제재에서 러시아 LNG 운반선과 쇄빙선에 대한 유지·보수 등 일부 서비스 제공을 금지했다. 7월 제21차 제재에서는 러시아 ‘그림자 선단’ 선박에 대한 항만 접근금지를 확대하고 LNG 운반선 판매에 대한 신고 의무와 러시아 금융기관에 대한 추가 거래 제한 등을 도입했다. ‘그림자 선단’은 국제 제재 대상국인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 등과 거래하는 유조선을 말한다.
북극항로 통항 자체가 일괄적으로 제재 대상인 것은 아니다. 다만 러시아의 LNG 운반선과 쇄빙선, 금융기관, 에너지·해운 관련 기업 등에 대한 서방 제재가 확대되면서 러시아와 연계된 선박 서비스와 금융·보험·결제 구조를 둘러싼 규정 준수 부담은 상업 운항을 검토하는 기업이 살펴야 할 변수다.
제재와 별개로 북극항로의 운영 구조 자체가 러시아 의존을 높일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기존 초크포인트를 피하려다 다른 형태의 지정학적 의존이 생길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수에즈운하와 홍해의 불안 때문에 북극항로를 선택하더라도 북극해항로에서는 러시아의 항행·쇄빙 인프라 의존이 커질 수 있다. 항로 다변화가 기존의 지정학적 위험을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 바꾸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는 지적이다.
환경 규제·전문인력·정비 인프라…상업화는 ‘종합전’
환경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북극은 저온과 해빙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오염사고가 발생했을 때 대응이 쉽지 않다. 북극이사회 산하 연구에서는 일부 저유황 선박연료가 차가운 북극 바다에 유출될 경우 고체화돼 덩어리를 형성하면서 기존 기름 회수 장비의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IMO는 2024년 7월부터 북극해에서 중유(HFO)를 선박 연료로 사용하거나 연료용으로 싣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등 극지 해양환경 보호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향후 선박 운항이 늘어날수록 환경보호를 위한 비용과 규제가 북극항로의 경제성을 좌우하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결국 부산항의 북극항로 거점화도 단순히 선박이 기항하는 데 그쳐서는 관련 산업의 파급효과를 충분히 확보하기 어렵다. 정부는 극지 전문인력 양성, 친환경 연료 공급 인프라 구축과 함께 해양금융·선박 유지보수정비 등 관련 서비스산업 육성을 추진하고 있다. 향후 실제 시범운항 데이터를 축적하면서 이런 산업 기반을 어느 수준까지 갖출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북극항로의 가치는 수에즈항로보다 얼마나 짧은지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기존 항로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는 운항이 가능한 시기에 공급망의 선택지를 하나 더 확보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새로운 항로가 러시아라는 또 다른 지정학적 의존으로 이어지거나 안전·환경 비용이 경제적 이점을 상쇄한다면 효과는 제한될 수 있다. ‘지름길’을 확보하는 것과 공급망을 더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북극항로 시대를 준비하는 한국이 경제성과 함께 안전, 환경, 지정학적 위험을 동시에 따져야 하는 이유다. 박성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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