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 패션의 역사
혹독한 자연환경 속 생존 위해 발달한 직조기술
스웨덴·러 지배 거치며 민족 정체성 옷에 투영
독립·전쟁의 격랑 속 고유한 ‘절제의 미학’ 형성
마리메코, 대담한 패턴·구속 없는 실루엣 인기
전통·현대 엮어 ‘자유를 입는’ 핀란드 패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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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차가운 설원과 침엽수림이 끝없이 교차하는 혹독한 지리환경 속에서 직물은 인체 피복을 넘어 생존을 위한 건축물이자 보호막으로 기능해 왔다.
북유럽의 핀란드는 척박한 토양과 거친 기후 속에서 자생적으로 발달한 페레시(feresi·카렐리야 지방의 전통 민속의상)와 파일 직조(pile weave·원단 표면에 짧은 털이나 고리를 만들어 촉감과 흡수성을 높이는 직조 방식) 직물인 류위(ryijy)는 일상적인 장식성을 초월해 북유럽 특유의 공간 감각과 원초적인 물성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북방 직조 문명의 정수다. 이는 혹독한 동토에서 신체를 보호하는 실용적 외피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조형 언어를 이루며 현대 모더니즘 섬유 예술의 구조적 근간으로 이어졌다.
문헌과 유물에 근거해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류위 직물은 중세 후기 스칸디나비아반도와 핀란드만 일대를 장악했던 스웨덴왕국의 투르쿠성 및 해상 요새 재산 목록에서 해양 항해자와 주둔군의 방한용 침구이자 모피 대용물로 처음 모습을 드러낸다.
날실과 씨실 사이에 굵은 양모 결절을 촘촘히 엮어 손가락 마디 굵기의 두터운 파일층을 형성하는 이 독특한 매듭 기술은 혹독한 발트해의 습기와 냉기를 완벽히 차단하기 위한 생존의 산물이었다. 이후 근세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류위는 점차 기하학적 문양과 상징적 색채가 가미된 혼례용 카펫이자 가문의 위계를 드러내는 벽면 장식이나 카펫용 직물로 그 조형적 지평을 넓혀간다.
동방 정교회 문화권과 라틴 가톨릭 질서가 첨예하게 충돌하던 카렐리야 국경 지대에서 태동한 페레시는 러시아식 복식 구조에 핀란드 카렐리야 특유의 섬세한 수공예 기술을 보여준다. 헐렁한 아마포 블라우스 위에 덧입는 사다리꼴이나 원통형의 슬리브리스 원피스 형태로서 비잔틴-노브고로드(Byzantine-Novgorod)의 의복 양식과 페노스칸디아(Fennoscandia) 토착 방직 기술이 융합된 독창적 산물이었다. 특히 자연 속에서 채취한 지의류(地衣類)와 자작나무 껍질, 꼭두서니 뿌리로 물들인 강렬하고 선명한 붉은 색의 색채 대비는 장식의 과잉을 엄격히 통제하고 구조의 견고함을 최우선으로 삼았던 북방 거주민의 농본적 생활 질서와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정밀하게 투영하고 있다.
이 두 양식은 스웨덴 왕국과 모스크바 대공국, 이후 러시아로 이어지는 거대 패권 세력의 각축 속에서 영토와 주권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던 북유럽 완충지대의 지정학적 긴장을 직물의 씨실과 날실 속에 흡수하며 고유한 지역적 조형체계를 형성해 나갔다.
19세기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핀란드가 수백 년간 지속된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 러시아 제국 내 자치 대공국으로 재편되던 근대적 전환기 속에서 이들 직조 문화는 단순한 향토적 실용물을 넘어 민족적 정체성을 규정하는 조형적 기표로 격상됐다.
엘리아스 뢴로트가 카렐리야의 오지에서 채록한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의 출간 등으로 촉발된 민족낭만주의 예술 운동은 러시아 제국 말기 니콜라이 2세 치하의 가혹한 러시아화 정책과 제국주의적 압박에 맞서는 북방 문화 정체성의 구심점이 됐다.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를 비롯한 선구적인 지식인들은 류위 직조의 원초적 질감과 페레시의 구조적 절제미를 국가적 순수 조형 예술의 반열로 끌어올렸다. 특히 카렐리야 전통 페레시가 지닌 단순하고 직선적인 실루엣과 류위의 대담한 색면 구성은 서구 열강의 화려한 코르셋과 궁정 장식 취향에 물들지 않은 채 순수한 기하학적 추상성을 보존했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북방의 독자적 미학으로 널리 공인받는다. 이는 훗날 1917년 10월 혁명의 격변 속에서 마침내 쟁취한 신생 독립 공화국의 시각적 주권을 대변하는 독보적인 양식적 토대로 작용했다. 당대 지식인과 공예가들은 이러한 전통 복식의 직선적 구획과 직조 매듭 속에서 북유럽 고유의 합리주의적 조형관을 발견했다. 이는 향후 전개될 현대 북유럽 디자인의 기능주의 미학을 예고하는 결정적인 징후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핀란드는 이웃한 소련과 겨울전쟁(Talvisota) 및 계속전쟁(Jatkosota)을 치렀다. 전후 국토의 10분의 1이 넘는 면적과 카렐리야를 포함한 주요 영토를 상실하고 40만 명이 넘는 피란민 수용과 막대한 전쟁 배상금, 냉전기 중립국 노선이라는 가혹한 국제정치적 제약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핀란드는 전쟁이 남기고 간 폐허 속에서 국가적 재건을 도모하기 위해 독자적인 산업디자인 혁신을 추진했다.
1951년 아르미 라티아에 의해 설립된 마리메코는 바로 이러한 전후 복구와 현대 냉전기에 형성된 동서 진영 간 팽팽한 세력 균형이라는 지정학적 무대 위에서 카렐리야 지역 피란민의 집단 기억과 류위의 풍부한 색채 유산을 현대적인 기성복 체계로 환원시킨 기념비적 결실이었다. 마리메코는 전후 서유럽을 지배하던 파리 중심 오트 쿠튀르의 크리스찬 디올식 뉴룩이 강요한 상·하체의 대비를 이용한 인위적 형태의 신체 굴곡과 장식 과잉의 부르주아 테일러링을 단호히 거부하고 페레시 고유의 원초적 일자형 구조와 류위의 평면적이면서 대담한 그래픽 패턴을 대량 인쇄가 가능한 현대적 스크린 프린팅을 면직물에 직접 투사하는 급진적 조형 실험을 감행했다. 마이야 이솔라를 위시한 디자이너들이 창출해 낸 과감하고 원초적인 패턴들은 전후 냉전의 암울한 그림자 아래서 사회적 회복과 활력을 표상하는 시각적 매개체였다. 신체를 구속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성을 보장하는 직선적이고 건축적인 실루엣은 장식과 과시를 배제한 순수한 기능주의적 모던 복식의 불멸의 전형을 정립했다.
세계 패션계에서도 이러한 핀란드 전통의 직조와 결합 방식은 여전히 유효한 미학적 방법론으로 계승되고 있다. 마리메코는 최신 컬렉션을 통해 전통적인 페레시의 원통형 레이어드 구조와 류위 특유의 입체적 질감을 현대적 기능성 직물 및 고밀도 자카드 직조 기술로 재해석하고 있다. 2026년 가을·겨울 시즌의 발표를 통해 공개된 마리메코의 아카이브 복각 라인과 구조적 아웃웨어는 과거 파일 직조에서 파생된 두터운 울 파일의 촉각적 깊이감을 입체적인 기하학적 엠보싱 텍스처로 치환하는 한편 카렐리야 전통 페레시의 개방형 측면 구조를 모듈식으로 현대화한 상자형 실루엣의 튜닉 드레스를 선보이고 있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민속적 도상을 표피적으로 모방하는 차원을 넘어 복잡해진 현대의 글로벌 공급망과 산업적 생산체계 속에서 원초적 직물의 밀도와 조형적 절제를 구조적으로 결합하는 핀란드 고유의 객관주의적(objectivist) 직물 방법론을 명확히 보여준다.
오늘날 핀란드가 선보이고 있는 패션은 가혹한 동토에서 태어난 직물의 텍스처와 직선의 옷이 시대를 초월해 형태의 본질을 웅변한다. 역사와 대지의 무게를 견뎌낸 조형은 마침내 유행의 풍화를 넘어 영원한 양식으로 침묵의 숲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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