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합니다
프랑스 생시르 사관학교, 외국인 위탁생도 중 1등 정재윤 소위
프랑스어 6개월 배우고 떠난 길, ‘인간 병기’ 별명 얻기까지
밤마다 촛불 켜고 사전 펼쳐가며 공부
아마존서 강물과 벌레 함께 삼키고
영하 날씨에 사흘 연속 행군하기도
“장교는 나의 정체성…조국 위해 헌신”
12년 만이었다. 프랑스 명문 군사학교인 생시르 사관학교에서 한국인 장교가 ‘수석졸업’을 차지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외국인 위탁생도 22명 중 1등, 아마존 정글과 영하의 산악행군까지 견뎌 낸 결실이었다. 프랑스어 한마디 제대로 못 알아듣던 검은 머리 외국인이 전우들 사이에서 ‘인간 병기(Machine de guerre)’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정재윤(육군사관학교 82기) 소위의 위탁교육 여정을 들여다봤다. 이원준 기자/사진=육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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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안 통해도 포기는 없다
육군사관학교(육사)는 지난 7일 교내 충무관 세미나실에서 박후성(중장) 학교장 주관으로 프랑스 생시르 위탁생도 정재윤 소위의 졸업·임관식을 했다. 이 자리는 단순한 임관행사가 아니었다. 지난달 25일 열린 생시르 졸업식에서 최우수상(prix d’excellence·외국인 장교 수석)을 받은 정 소위의 값진 성과를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정 소위가 이수한 생시르 정규과정(3년)에는 프랑스 자국인을 포함해 총 15개국에서 189명의 생도가 함께했다. 이 중 외국인 위탁생도는 14개국에서 온 22명. 최우수상은 이들 22명 가운데 군사·체육·학술·리더십 전 분야를 통틀어 가장 높은 성적을 거둔 한 명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로운 상이다. 우리 육사 생도가 이 상을 받은 것은 12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정 소위의 성과가 더 이례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같이 교육받은 외국인 위탁생도 대부분이 프랑스어권 출신이거나 현지 군사고등학교나 그랑제콜 준비반(prepa)에서 2~4년간 프랑스어를 다진 뒤 입교했다. 반면 정 소위는 출국 전 6개월간 준비한 게 전부였다.
그 격차는 현지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정 소위는 “육사에서 집중적인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음에도 현장의 언어장벽은 높았다”며 “교과서 속 어휘와 생시르에서 쓰는 실제 군사언어가 판이해 초기엔 교육 내용도 거의 이해하지 못했고 동기들과 깊이 교류하기도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설상가상으로 첫 학기는 기초군사훈련 기간이어서 전자기기 사용까지 제한됐다. 그는 매일 4시간 남짓한 수면시간을 쪼개 몰래 촛불을 켜고 두꺼운 프랑스어 사전을 펼쳐 낮 동안 배운 전술교범을 복습하며 한계를 극복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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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글, 영하의 산속에서 체득한 ‘전우애’
언어의 벽을 넘어선 뒤에는 몸의 한계를 시험하는 훈련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수전 전문가를 꿈꾸는 정 소위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마존 정글전 코스와 코만도 코스다. 아마존 코스에 앞서 각종 백신을 맞고 위생교육을 철저히 받았지만 2주 동안 덥고 습한 정글에서 제대로 자지도, 씻지도 못한 채 숲을 헤치며 행군해야 했다. 식수 보급이 불가능해 강물에 정제 알약을 타 마셔야 했던 순간 목구멍으로 벌레와 진드기가 넘어가는 상황에서도 그는 삼키기를 멈추지 않았다. 정 소위는 “그 경험이 자신감의 원천이 됐다”고 말했다.
코만도 코스는 또 다른 시험대였다. 영하의 날씨에 사흘 연속 잠들지 못한 채 산속을 행군하며 환각과 환청까지 겪었다. 그는 “사람이 걸으면서도 잠들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동시에 힘든 상황에서 먼저 나서 동기를 챙기고 희생하는 동료들의 모습에서 그는 “우정을 뛰어넘는 전우애를 진정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전했다.
나를 몰아붙여 이겨 낸 열등감
프랑스어권에서 수년간 준비하고 온 동기들 사이에서 정 소위는 한동안 열등감과 싸워야 했다. 그는 “아무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봐도 해답은 오로지 이 상황을 이겨 내고 발전하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일과시간은 물론 주말에도 배운 내용을 복습했고, 모르는 부분은 동기들에게 적극적으로 물어가며 채워 나갔다. 군사훈련 중에는 다양한 지휘 직책에 자원하며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으려 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동기와 훈육요원들에게 군인으로서 인정받으며 관계도 넓어졌다. 프랑스어 실력은 물론 군사적·신체적 역량도 함께 성장했고, 성적은 서서히 올라 3학년 때는 프랑스 동기들과 비교해도 상위권에 들었다. 그렇게 얻은 별명이 ‘인간 병기’다.
야전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도전
정 소위는 이제 육군소위로서 새로운 시작점에 섰다. 그는 제1·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생시르 선배인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원수의 말을 인용하며 각오를 밝혔다. “군인이 안정적인 직장인으로 안주하는 것을 가장 경계해야 하며, 군인은 조국수호를 위한 무한한 헌신과 열정으로 존재 가치를 항상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 소위는 “나에게 장교는 하나의 직업을 넘어 정체성이자 뜨거운 자부심이며, 조국 대한민국은 목숨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절대적 가치”라며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이 그 어느 때보다 긴박한 지금 육사인으로서, 생시리앙으로서 정신력을 바탕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조국과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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