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항행시대의 종말과 과제
① 위협받는 자유항행
② 떠오르는 새로운 항로
③ 전문가 인터뷰
분쟁 직격탄 맞은 자유의 바다 원칙
글로벌 해양질서가 재편된다
유엔해양법협약 따른
선박·항공기의 권리
분쟁지역서는 무력화
美 강력한 해군력 바탕
해양질서 종말 진단
무역 대부분 해양 운송
韓, 거센 파도 직면
글로벌 공급망을 받치는 해상 대동맥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해양의 자유’가 당연시되던 시대가 저물고 해상 무역로는 그 어느 때보다 거센 파도에 직면해 있습니다. 무역의 대부분을 해상 운송에 의존하는 한국에 자유항행의 위협은 국가 경제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국방일보는 위협받는 자유항행시대의 문제를 조명하고 그 대안을 찾아보는 특별기획을 26일부터 3일간 게재합니다.
지난 80여 년간 지속돼 온 ‘자유항행시대’의 종말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세계 해상 물류의 핵심 통로인 주요 해협을 둘러싼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지면서다. 중동에서는 호르무즈 해협의 통항 위협이 장기화하고, 홍해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도 민간 선박을 겨냥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 이 같은 위험 증가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어져 온 자유항행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
분쟁 때마다 위협받는 에너지 공급로
호르무즈 해협의 불안은 세계 에너지 시장을 직접 흔드는 요인이다. 세계 LNG 교역에서도 호르무즈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20%에 달한다.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UAE) 등 중동 주요 LNG 생산국의 주요 수출로가 이 해협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한국·중국·인도 등 아시아 국가의 에너지 공급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하지만 이들의 해양 공급로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 이후 이란의 해협 봉쇄로 이용량이 급감하고 있다.
해운데이터 업체 ‘케플러’에 따르면 지난 17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상품 운반선은 6척으로, 직전 10일 평균인 11척에도 미치지 못했다. 초대형 원유운반선(VLCC)과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통항은 확인되지 않았다. 같은 날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지난 상품 운반선도 19척으로 최근 10일 평균 26척을 밑돌았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에 따르면 2024년 하루 2000만 배럴 안팎의 원유와 석유제품이 호르무즈 해협을 지났다.
호르무즈 해협의 자유로운 항해가 위협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도 양국은 상대방 경제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공격 대상을 확대했다. 당시 이라크 대통령 사담 후세인이 1984년 이란 최대 석유기지 하르그섬과 유조선들을 공격하자 이란은 이라크의 전쟁 물자 유입 통로였던 쿠웨이트 유조선들에 반격을 가했다. 이에
1986년 쿠웨이트가 보호를 요청하자 미국이 호위작전을 시행하기도 했다. 후일 언론은 ‘미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 기록을 인용, 1987년 말 기준 이라크와 이란이 각각 283·168차례 선박을 공격해 상선 선원 사망 116명과 실종 37명, 167명의 부상 피해를 보도했다.
호르무즈 봉쇄보다 더 위험한 홍해 위협
‘해상 공급로’의 위협은 호르무즈 해협에 그치지 않는다. 홍해와 인도양을 잇는 요충로인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도 후티의 공격과 봉쇄 위협이 이어지며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가장 빠른 바닷길인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기 위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항로다.
수에즈 운하는 전 세계 해양 화물의 약 15%가 이용하는 주요 교통로다. 후티 반군은 2023년 말부터 이곳을 지나는 선박들에 드론과 로켓 공격을 가하며 주도권을 잡고 있다. 예멘 후티 반군의 공격이 이어지자 주요 선사들은 홍해와 수에즈 운하 대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가는 항로를 선택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에 따르면 2025년 5월 수에즈 운하 통과 선박 톤수는 2023년 평균보다 약 70% 낮은 수준이었다. 희망봉 우회에 따라 선사들이 부담하는 비용 상승과 운용기간 연장의 요인이 됐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후티 반군의 해협 통제권 강화를 위한 공세는 더 거세졌다. 이들은 홍해의 전략적 도서 지역 장악을 시도하고 있다. 후티가 이곳의 통제권을 강화하면 세계 경제가 받는 타격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세계 각국은 최악의 상황을 우려하며 대응 마련에 고심하고 있다.
남중국해 갈등·말라카 해상강도…아시아 길목도 불안
아시아의 주요 해상교통로도 지정학적 안보 위험에서 자유롭지 않다.
말라카·싱가포르 해협에서는 선박을 노린 해상강도가 또 다른 위험 요인이다. 아시아해적퇴치협정 정보공유센터(ReCAAP ISC)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이 해역에서 21건의 선박 대상 무장강도가 발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크게 줄었지만 아시아 전체 발생 건수의 60%가 이곳에 집중됐다. 말라카 해협은 인도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핵심 에너지 초크포인트이다. 사고나 범죄, 군사적 충돌 등으로 통항에 차질이 생길 경우 무역우회에 따른 추가 거리와 비용 부담도 커질 수 있다.
남중국해에서는 중국과 필리핀 등을 둘러싼 영유권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 스카버러 암초 주변에서는 중국 해경의 활동이 늘었고 양국 선박 간 위험한 근접 상황도 반복됐다. 아직 일반 상선의 통항이 광범위하게 제한되는 단계는 아니지만 군사적 긴장이 높아질 경우 세계적인 에너지·물류 수송로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은 잠재적 위험으로 꼽힌다.
해적과 해양강국이 지배하던 해상무역로
해협은 예나 지금이나 단순한 바닷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넓은 바다가 좁아지는 길목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교역과 군사 활동이 결정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근대적인 국제 해양질서가 자리 잡기 전에는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나 지역 세력이 주요 항로의 안전과 통행을 사실상 좌우했다. 국제법에 따른 통항권보다 항로를 지킬 수 있는 군사력과 해당 지역 세력과의 관계가 선박의 안전을 결정짓던 시기였다.
16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지중해에서는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국가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해적 활동을 통해 외국 상선을 나포하거나 공물을 요구했다. 당시 신생국이던 미국 역시 한동안 공물을 지급해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두 차례에 걸친 바르바리 전쟁에서 승리하며 본격적인 해양 강국으로 부상했다. 이보다 앞선 17세기, 네덜란드의 법학자 후고 그로티우스는 저서 『자유해양론(Mare Liberum)』을 통해 바다는 특정 국가가 독점할 수 없다는 개념을 던졌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은 점차 바다를 여러 국가가 공동으로 이용해야 한다는 ‘공해 자유’ 원칙으로 발전했다.
덴마크가 1429년부터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외레순 해협’에서 부과해 오던 이른바 ‘외레순 통행세’를 1857년 최종 폐지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변화의 결과였다. 400년 넘게 무력으로 유지되던 해협 통제가 사라지면서, 자유로운 해상 교통과 근대적 공해 자유의 원칙은 국제 해양질서의 핵심 축으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됐다.
자유항행시대는 종말을 고할까?
20세기에 들어서는 이러한 원칙이 국제법으로 구체화됐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과 알바니아 사이에서 발생한 군사 충돌이었던 1949년 코르푸 해협 사건에서 국제 항행에 이용되는 해협의 평시 통항 권리를 인정했다. 이후 1982년 제정된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은 국제항행용 해협에서 모든 선박과 항공기의 ‘통과통항’ 권리를 정식으로 명시했다. 동시에 연안국에도 항행 안전과 해상교통, 오염 방지 등을 위한 일정한 규제 권한을 부여했다.
해협을 둘러싼 역사는 좁은 바닷길을 통제하려는 힘과 이를 자유롭게 이용하려는 요구가 끊임없이 충돌하며 규칙을 만들어온 규범화의 과정이다. 따라서 국제법이 촘촘해진 오늘날에도 전략적 길목을 실제로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세계 교역과 안보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절대적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통항할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과, 선박이 실제로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군사력 시위, 선박 피격, 기뢰, 봉쇄 위협 등은 언제든 항로 이용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온 ‘팍스 아메리카나’식 해양질서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는 진단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수출입 물동량의 99% 이상을 바닷길에 의존하는 한국이 이 거대한 파도를 단순히 방관자로서 바라볼 수 없는 이유다. 박성준 기자
자유항행시대
국제법상 항행의 자유와 미국의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국제 해양안보 질서에 의해 상선이 주요 해상교통로를 비교적 안전하게 이용해 온 시기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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