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역사
① 국군의 군사역사 전통의 서막과 김구의 치하포 의거
② 의병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③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④ 시대를 앞선 대한민국 군대
⑤ 또 다른 독립전쟁, 의열활동과 그 기록
⑥ 국군의 군사교육으로 정예 국군 양성
⑦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
⑧ 광복과 함께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1901년 이후 군사비 비중 40% 육박
황실 수호 집중…국가의 군대와 거리
을사늑약·정미조약 통해 의병 확산
러·일 전쟁 계기 대한제국군 해산
일본군 맞서 의병과 연합전선 펼쳐
국방일보는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를 맞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 김구의 독립활동과 국군의 군사역사 및 전통을 정리하는 연재기획을 총 8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군사역사에서 국군의 역사적 전통을 조망하면서 김구의 역할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김구의 의로운 독립활동 여정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조인돼 개항의 길로 접어든 1876년 태어난 김창암(金昌巖·김구의 아명)은 개항기 격동의 역사와 함께 아동기를 거쳤다. 김창암은 평등과 의리의 사상을 접하며 동학에 입도하며 이름을 김창수(金昌洙)로 개명해 외세 침략에 맞섰다. 1896년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선구적인 치하포 의거로 국모 시해의 원흉을 처단한 김창수는 불의에 맞서는 의를 실천했음을 천명했다. 김창수는 1900년 이름을 김구(金龜)로 바꾸며 애국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00년부터 1904년까지 교육으로 독립역량을 배양하고자 했던 김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로 상경해 그 불법성을 지적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했다. 일제의 탄압에 대항해 교육사업으로 황해도의 해서교육회(海西敎育會), 서명의숙(西明義塾), 보강학교(保强學校)에서 교사로 생활했다. 김구는 1909년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연루됐다는 혐의로 해주재판소에 투옥됐다. 최종 불기소로 풀려난 김구는 1910년 서울에서 개최된 신민회(新民會)의 비밀회의에 참석했다. 신민회는 한국인을 만주로 대대적으로 이민시키고, 무관학교를 창설해 무장대오를 양성할 계획을 세우고 구체적인 실현 방법을 논의했다.
1911년 김구는 일제가 조작한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 암살모의에 연루돼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수감 중 이름을 김구(金九), 호를 백범(白凡)으로 바꿔 독립의지를 천명했다. 1914년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된 뒤 가출옥한 그는 3·1운동 직전까지 농촌 개량운동에 전념했다. 김구는 개항과 함께 태어나 3·1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독립운동사의 역사현장에서 의병활동, 의열활동, 애국계몽운동, 농촌개량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독립활동을 펼쳤다. 김구는 을미의병기 치하포 의거를, 을사의병기 국권회복운동을, 한일병합기에 신민회운동을 전개하는 등 국군의 역사 흐름에 의미있는 독립활동을 전개했다.
조선말기 개항에서 대한제국으로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조선은 내부적으로 사회모순, 대외적으로 서구열강의 침입에 직면했다. 조선은 전통적인 가치와 근대적인 가치의 충돌로 인한 격동기를 맞아 효과적인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 대한제국, 러일전쟁, 을사늑약, 통감부 설치, 고종퇴위와 군대해산 등을 경험했다.
비록 전제군주제라는 한계는 있었지만, 조선은 1897년 10월 12일 선포된 대한제국으로 전환돼 독자적인 군제와 군대를 갖추고자 했다. 조선은 개항 이후 대한제국까지 다양한 편제를 경험했다. 개항 직후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총융청, 수어청의 5군영 체제, 1881년 일본식 신식군대인 교련병대(敎鍊兵隊), 1882년 청나라식 신건친군 좌·우·전·후영,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친위대와 시위대, 아관파천 이후 시위대, 지방대와 진위대, 대한제국의 시위대 강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최고 통수조직인 원수부 설치 등 근대적 통수체제를 갖췄다.
대한제국의 군대양성과 무기체계 개선 노력은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다. 특히 1897~1900년간 세출예산에서 군사비는 25%, 1901년 이후 40%에 육박했다. 군사비 확보는 편제와 군사장비, 군사교육의 개선을 가져왔다. 그러나 현실적인 정세의 한계로 황실 수호와 치안 확보에 집중돼 국가의 군대로 거듭나지 못했다.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독립전쟁
대한제국의 군대 확대 및 강화 노력에 자극을 받은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키며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자 친일적인 고문을 파견해 내정간섭 및 군대 해체를 추진했다. 원수부의 군령권을 군부로 이관시켜 지휘체계를 해체하고, 1905년 4월 최소 병력만 남기고 시위대와 친위대를 폐지했다. 1905년 11월 17일,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일제의 을사늑약에 분노한 한국인은 을사의병을 창의해 의병전쟁을 전개했다. 충청도 민종식(閔宗植), 전라도 최익현(崔益鉉), 경상도 신돌석(申乭石) 등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 의병장들이 대거 참여해 일제에 맞서 싸웠다. 을미의병에 비해 양반·유생 중심에서 평민 출신 지도자들이 다수 등장했지만 무기와 편제, 훈련의 열악함을 극복하지 못했다.
일제는 1907년 7월 20일,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한 고종을 강압적으로 퇴위시키고, 7월 24일 정미7조약을 체결했다. 대한제국 군대의 교육이 불완전하고, 군기가 문란하다는 엉뚱한 명분으로 황궁 호위의 1개 대대만 남기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제국 군대는 고종의 퇴위를 막고자 했지만 친일파의 밀고로 실패했다. 일제의 겁박으로 작성된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지시하는 순종의 조칙이 하달되자 시위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朴昇煥) 참령은 자결로 대일전투를 촉발시켰다.
軍不能守國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臣不能盡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萬死無惜 만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박승환 참령은 자결을 선택함으로써 불합리한 해산명령에 지휘관으로 자신은 따르더라도 휘하 대한제국 군인들의 대일전투를 치르는 명분을 세워줬다.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의 군인은 일본군과 시가전을 치열하게 펼쳤다. 당시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들의 분노와 전투의지는 프랑스 기자의 생생한 기사에 기반한 ‘르프티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실린 남대문 전투 삽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전투에 참전한 1000여 명 가운데 전사 68명, 부상 100명, 실탄이 없어 포로가 된 516명을 제외한 약 300명은 탈출해 지방에서 정미의병과 연합해 독립전쟁을 수행했다. 중앙의 군대해산에 이은 지방 진위대 해산이 시도되자 원주 진위대, 강화 분견대 등 지방 진위대는 강력하게 대일전투에 나섰다.
해산된 대한제국 군인은 독립군의 이름으로 독립전쟁의 선봉이 되다
한국 군사역사는 개항 이후 격동의 역사였다. 국가방위라는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기에 정치, 사회, 경제적 여건은 매우 열악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청일전쟁을 경험하며 근대적인 군대로 변모를 시도했지만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원수부 설치, 군사비 증강, 편제 개편을 통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는 과정에 일본의 위기의식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철저하게 군대를 해산시키고자 했다. 군대해산에 직면해 대한제국 군대는 황제의 퇴위를 반대하고, 해산을 거부해 일본군과 전투했으며, 정미의병과 연합해 독립전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군인으로 치욕적인 해산에 직면한 대한제국 군인은 분연히 일어나 일본군과 싸웠으며,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한 의병과 연합했다. 대한제국 군인이 합류하면서 조직, 훈련, 전투에 익숙한 군대의 합류, 의병과 군대의 연합이라는 점에서 국군의 역사에서 의병전쟁이 본격적인 독립전쟁으로 전환되는 역사성을 지닌다. 대한제국을 경험하며 한국민의 마음에 우리는 대한의 사람이라는 의식이 존재했다. 이런 의식은 대한제국 군대해산 이후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밝힌 점에서 확인된다. 의병에서 대한의군으로, 대한의군은 독립군으로 이어지며, 한국인의 독립을 위한 군대라는 의식이 가슴에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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