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리만 더…그 길목서 만난 풍경 그리고 소월

입력 2026. 08. 20   15:45
업데이트 2026. 08. 20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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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왕십리, 무·배추를 일궜던 공간

한성부 행정력 미치던 ‘성저십리’
한양 도읍지 탄생 설화 깃든 공간
상인·중인 무·순무·배추 많이 심어
경원선 개통 동북부 중심으로 부상
6·25 이후 상경민 몰려 산동네 형성
재개발로 쇼핑몰·아파트단지 변신

왕십리 오거리.
왕십리 오거리.

 

무학봉에 세워진 무학대사상.
무학봉에 세워진 무학대사상.

 

상왕십리역에 새겨진 김소월 시 ‘왕십리’.
상왕십리역에 새겨진 김소월 시 ‘왕십리’.

 


서울의 유서 깊은 지명 가운데 하나인 왕십리는 현재 왕십리역을 중심으로 한 황학동·신당동·도선동·홍익동·무학동·행당동 등을 아우른다. 마장동과 금호동, 옥수동 등도 생활권에 속한다. 조선시대에는 시구문(광희문)을 나서면 곧장 만나던 공간이었다. 도성 바깥이지만 한성부의 행정력이 미치는 ‘성저십리(城底十里)’에 해당했다. ‘왕십리(往十里)’ 지명도 한성부와의 거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성부는 치안을 위해 사대문 안은 7~8개의 패(牌)로 나누고, 외곽인 한강 유역은 6개의 자내(字內)로 쪼개 시찰했다. 육강 자내에 해당했던 왕십리 구역은 동대문 밖 영도교에서부터 아차산 전농리까지였다(『만기요람』). 한성부의 인구가 10만 명일 때 한양 사방 십리에는 모두 6000명이 거주했다(『세종실록지리지』).

왕십리는 수도와 지방을 잇는 길목이어서 유동이 잦아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됐다. 송파를 건너 국토의 동남쪽을 오가던 사람들이 날이 저물면 이곳 여관에서 묵었다(『고운당필기』 『송자대본』 등). 지방에서 벗이 올라와 함께 지내다가 돌아갈 때면 이곳까지 배웅을 나오곤 했다(『하재일기』). 주요 경유지다 보니 왕십리 사람들은 세상사에 밝았고, 기회 포착에 능했다. 마병(馬兵) 하나가 임지로 떠나는 신임 통제사의 뒤를 무작정 따라가 쓸모를 보임으로써 통제영의 비장(裨將)에 발탁된 이야기를 정현동(1730~1815)의 『만오만필』이 전한다.

상인과 중인 계층이던 주민들은 무·순무·배추를 많이 심었다(『용재총화』).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를 호종해 선양에 갔던 역관 홍끗룡(洪唜龍)이 환국하면서 가져온 종자에서 비롯됐다(『정조실록』, 6년 2월 3일). 세자를 보필했던 궁녀 홍덕(洪德)도 낙산 비탈에 채소를 심어 김치를 만들어 궁에 올렸다. 동대문 훈련도감 군병들도 영내에 채마밭을 일구었다(『한경지략』). 구보는 동대문 바깥이 온통 채소밭이었을 것으로 여긴다. 왕십리 농부들은 이 채소를 동대문 안쪽의 배오개 시장에 내다 팔았다. 중랑천 천변에 농산물 창고를 두고 홍수 때면 보축 공사를 했던 기록에서도 왕십리가 채소의 중요 산지였음을 알게 한다(『인조실록』, 10년 2월 13일).

이 일대는 무학대사와 도선대사의 일화가 전할 만큼 범상치 않았던 공간이었다. “무학이 이곳을 도읍지로 여겼으나 도선의 혼백이 나타나 ‘십리를 더 가보라’고 일렀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무학’과 ‘도선’이라는 명칭이 산봉우리와 학교, 동네 이름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왕릉 조성지로도 거론됐다. 문종 때 ‘왕십리 북쪽에 작은 산을 만들어 소나무와 홰나무를 심어 명당을 만들자(『문종실록』, 2년 3월 3일)’는 풍수학 문맹검의 상언에서 구보는 이곳이 왕릉 후보지로 오르내리기는 했으나 적지로 평가받지는 못했음을 짐작한다. 윤선도(1587~1671)가 풍수를 살펴 쓴 ‘산릉의’에도 왕십리는 기가 약하며 혈 앞의 봉긋 솟은 부분이 단정하지 못해 쓸 만한 곳이 못 된다(『고산유고』)고 낮게 평가됐다. 그러나 동단(東壇)을 둬 제사를 지내는 장소로 쓰기도 해서 그 입지가 가벼운 곳은 아니었음을 알게 한다. 기근이 들어 굶어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정조가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정조실록』, 3년 8월 9일).

구보는 왕십리의 위상이 시간이 흐를수록 낮아졌음을 발견한다. 조정 중신 가운데 죄를 지은 자를 일단 왕십리로 보내 대죄하도록 한 사실 때문이다. 광해군 때 영의정 기자헌이 투서를 당해 왕십리에 머물렀고(『광해군일기』, 9년 1월 21일), 1598년 임진왜란 와중에 서애 류성룡도 당쟁 탓에 논핵돼 영의정에서 물러나 왕십리로 옮겨졌다. 이순신이 남해에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탄식했다(『서애집』). 왕십리는 점차 그냥 ‘한양 바깥’으로만 인식될 뿐이었다고 구보는 여긴다.

조선 말기 동대문에 훈련도감이 들어서자 마장동 벌판에서 군마를 키우고 뚝섬 연무장에서 군사사열을 하게 되면서 하급 군인들이 왕십리로 몰려들었다. 그러다 1882년 6월 신식군대에 비해 처우가 낮은 데다 그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하던 구식군대가 난을 일으키자 주민들이 동조해 군란에 합세, 사건이 더욱 확대됐다. 고종이 불러들인 청나라 딩루창(丁汝昌)과 우장칭(吳長慶)의 군대가 왕십리 일대의 군란 주모자들을 모두 진압했다(『사화기략』). 왕십리는 근대 조선이 감당해야 했던 외압의 첫 희생지가 됐다.

1911년 경원선이 개통되고, 1938년 5월 성동교가 가설됐다. 서울에서 기차 편으로 왕십리에 내릴 수 있게 됐고, 잦은 홍수를 감당하지 못하던 살곶이다리를 콘크리트 다리가 대신하게 됐다. 이후 왕십리는 성수동과 광나루 방면으로 뻗어 나가는 새로운 축을 얻으며 서울 동북부의 중심으로 변모해 갔다(서울역사아카이브).

해방과 전쟁은 왕십리의 모습을 또 한 번 바꿔놨다. 1954년 한양대가 왕십리역 동쪽에 자리 잡으면서 역과 대학 사이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고, 이때부터 왕십리의 중심지는 옛 황학동 쪽에서 왕십리역 쪽으로 서서히 옮겨 가기 시작했다. 6·25전쟁 이후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들이 몰려들어 너도나도 집을 지으면서 무학봉 비탈에는 산동네가 형성됐다. 행당동과 도선동, 하왕십리 등에 하나둘 시장이 들어서고 1979년 성수대교가 놓였으며, 1983년에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는 등 왕십리는 변화를 거듭했다.

새벽이면 아낙들이 나물과 어물을 이고 시장을 향했다. 좁은 골목 안에 자리 잡은 금형제조와 봉제 가공 공장들은 사대문 안의 큰 공장에서 떼어 온 하청 일감을 처리하느라 종일 기계를 돌리던 게 20세기 후반 왕십리의 풍경이었다. 21세기 들어 왕십리는 오래 걸쳤던 옷을 벗는다. 2002년 ‘왕십리뉴타운 재개발’을 계기로 2008년 복합쇼핑몰을 갖춘 민자 역사가 생기고, 2012년 분당선 개통으로 강남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면서 무학봉 비탈의 산동네와 경원선 변 판자촌 자리에도 새 아파트가 들어섰다. 2005년 서울숲이 조성되고 인접한 성수동이 신흥 부촌으로 떠오르면서, 그 관문에 해당하는 왕십리 역시 나날이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서울역사아카이브).

구보는 상왕십리역에 내걸린 김소월의 시 ‘왕십리’를 마주하자 모습은 크게 바뀌었지만 어쩐지 ‘가도 가도 닿지 못했던’ 그 옛 왕십리의 심상을 놓지 못한다. 부지런히 걷는데도 풍경은 자꾸 달아나고 비는 계속 내려 절로 한숨짓게 만들던 ‘왕십리’는 잊히고 이제는 그리움으로만 남았음을 확인하며 열차에 올랐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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