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궐에 스며든 모더니즘 서양식 석조건물, 근대 미술 산실이 되다

입력 2026. 08. 20   16:34
업데이트 2026. 08. 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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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의 문법⑧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미술관 용도로 설계된 첫 근대 건축물
이중섭·박수근·김환기·유영국·허건…
근대 미술가 지속 발굴·재조명에 집중
올해는 이대원 작가 첫 대규모 회고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찍은 박중훈 작가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찍은 박중훈 작가의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정동길 돌담을 따라 덕수궁 안으로 들어서면 대한제국의 옛 궁궐과 근대 서양식 석조 건물이 나란히 놓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덕수궁은 임진왜란 직후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삼은 이래 고종이 아관파천 후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궁으로 삼은 곳이다. 이곳은 을사늑약과 헤이그 특사 파견, 고종의 강제 퇴위에 이르기까지 국권 상실의 격동이 고스란히 새겨진 근대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이 있다. 궁궐과 미술관의 문법이 한 공간에서 부딪히고 겹쳐지는 곳. 이곳을 방문하면 여러 겹의 시간을 발견하게 된다.

덕수궁관이 자리한 건물은 본래 대한제국 황실의 미술관으로 지어졌다. 1933년 덕수궁이 일반에 공개되면서 창경궁에 있던 이왕가박물관의 조선 고미술품을 옮겨 전시할 새로운 공간이 필요해졌다. 이에 석조전 서쪽에 별도의 전시관을 신축하기로 했다. 설계는 조선은행 건축을 감독했던 일본 건축가 나카무라 요시헤이가 맡았다. 1936년 착공해 2년 뒤 완공된 이 건물이 바로 이왕가미술관. 오늘날의 석조전 서관으로 한국에서 처음부터 미술관 용도로 설계된 최초의 근대미술관 건축이다.

건물에는 시대의 전환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정면의 기둥과 좌우 대칭의 구성에서는 질서와 균형을 중시하는 고전주의가 읽히지만 장식을 절제한 외관과 내부에서는 당시 확산되던 모더니즘의 영향이 드러난다. 중앙홀을 중심으로 전시실이 배치됐다. 3층 회랑에서 아래층까지 시선이 열리는 구조도 특징적이다. 미술관은 석조전 본관과 조형적으로 호응하도록 설계됐지만 두 건물의 배치에는 건축양식을 거스르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었다. 정작 더 현대적인 조형언어를 취한 신축 서관에는 조선의 고미술품이, 앞서 지어진 석조전 본관에는 일본의 근대미술이 놓였다. 총독부는 건물의 실제 시간성과는 무관하게 ‘현재의 일본, 과거의 조선’이라는 위계를 전시 내용으로 암시해 넣은 셈이다.

전통 궁궐 한가운데 자리한 이 서양식 미술관은 그 자체로 한국이 근대를 통과한 장면들과 겹친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 역할을 바꾸며 격동의 시간을 통과했다. 6·25전쟁 중 내부가 전소되는 피해를 봤고, 1950년대에는 국립박물관이 자리를 잡았다가 1973년부터는 국립현대미술관 본관으로 쓰였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한 뒤 한동안 비어 있던 이 건물은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고, 2013년 서울관이 개관하면서 지금의 ‘덕수궁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궁궐의 부속 건물에서 식민지 시기의 이념적 장치로, 전쟁의 폐허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출발점으로, 건물의 이력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의 축약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내력을 바탕으로 덕수궁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네 개 분관 중에서도 유일하게 ‘근대미술 전문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을 뚜렷이 내세우고 있다. 서울관과 과천관이 동시대 미술과 대형 기획전을 주로 다룬다면 덕수궁관은 한국 근현대미술의 형성기를 발굴하고 서구 중심의 모더니즘 담론 속에서 쉬이 잊히거나 왜곡된 우리 근대 미술가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재조명하는 데 집중해 왔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유영국 등 한국 미술사의 거목들을 조망한 회고전과 이인성과 남농 허건, 권진규, 구본웅처럼 미술사의 중심부에서 비켜나 있던 작가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근대미술가의 재발견’ 계열의 전시가 미술관의 오랜 축을 이뤄왔다.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처럼 일제강점기 예술가들의 지적 교류와 아방가르드적 실천을 입체적으로 다룬 기획전도 대중과 평단의 큰 호응을 얻었다. ‘궁궐’이라는 장소 특정적 서사 위에 근대의 기억을 겹쳐 올리는 연출은 관람객에게 미술 감상을 넘어 시대의 고뇌와 미학적 성취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하는 덕수궁관만의 고유한 문법을 구축했다.

이대원, ‘농원’, 캔버스에 유화 물감, 150×230㎝, 1979,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대원, ‘농원’, 캔버스에 유화 물감, 150×230㎝, 1979,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올해 덕수궁관은 이대원 작가를 초대했다. 8월 6일부터 11월 8일까지 열리는 ‘이대원: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작가 타계 20주기를 맞아 열리는 첫 대규모 회고전이다. 1930년대 학창 시절 습작부터 말년의 5미터급 대작 ‘담’ ‘농원’에 이르기까지 유화 120여 점과 아카이브 100여 점을 통해 약 70년에 걸친 작가의 화업을 총체적으로 조망한다.

이대원은 오랫동안 ‘화단의 신사’ ‘색채의 마법사’라는 수식과 함께 과수원과 산을 원색의 점과 선으로 그려낸 낙천적인 화가로 알려져 온 인물이다. 이번 전시가 겨냥하는 지점은 바로 그 통념이다. 그의 밝은 화면을 타고난 기질의 소산으로 보는 대신 자수·나전·화각 같은 한국 전통 공예의 색채 감각과 동양화의 준법·운필을 유화의 언어로 오랜 시간 변용해 온 결과로 다시 읽어내려는 것. 전시는 화가로서 기반을 닦은 1930~1950년대, 반도화랑을 운영하며 한국 미술의 유통과 국제교류를 이끌던 1950~1970년대, 색점과 색선과 색면을 거듭 쌓아 올려 독자적 조형언어를 완성해 간 1970~2000년대, 그 축적이 대형 회화로 만개하는 말년의 순서로 4부에 걸쳐 구성된다. 특히 이대원과 장욱진, 유영국을 함께 길러낸 스승 사토 구니오의 회화가 국내 처음으로 공개되고, ‘북한산’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온 1938년 초기작의 원제가 실은 ‘가을 산’이었다는 사실이 이번 조사를 통해 새롭게 밝혀졌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무엇보다 이 전시는 이대원을 풍경 화가라는 틀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 반도화랑을 통해 박수근, 장욱진, 김환기, 유영국 등을 해외에 소개하고 홍익대 미술대학 초대 학장과 총장을 지내며 미술 교육의 기틀을 놓았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장과 문화홍보외교사절로도 활동한 그의 이력은 창작과 공공의 역할을 함께 짊어졌던 지식인의 초상에 가깝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고고미술사학자 김원룡의 그림평에서 따온 문장인 ‘사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전시 제목은 슬픔의 부재가 아니라 오랜 연구와 절제를 통해 삶의 무게를 색채로 승화시킨 결과에 가깝다.

덕수궁관 역시 그렇다. 대한제국과 식민지, 해방과 한국 근대미술의 형성을 거치며 이 건물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켜켜이 쌓였다. 오늘 우리가 이곳에서 근대미술을 바라보는 일은 아름다운 옛 건물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건물이 품은 역사와 작품이 품은 시간이 만나 우리가 지나온 근대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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