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기도하고 존중하라… 신의 환대 속, 삶이 머물다 가는 곳

입력 2026. 08. 20   16:11
업데이트 2026. 08. 20   16:16
0 댓글

두 도시 이야기
스페인 마요르카와 인도네시아 발리<下>

무슬림 가장 많은 나라서 80%가 힌두교도인 섬
연중 온화한 기후 개방적이면서 전통 지켜온 디지털 노마드의 성지
서구 화가들은 예술의 씨앗 뿌려
오버투어리즘 직면한 요즘 머무름의 태도 질문 던져

인도네시아 발리는 외부인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온 섬이다. 15세기 힌두 난민들이 정착해 발리문화의 기틀을 다졌고, 1920~1930년대에는 서구 예술가들이 예술의 씨앗을 뿌렸다. 1970년대에는 호주 서퍼들이 몰려들었다. 오늘날 발리는 전 세계 디지털 노마드와 은퇴자들이 사랑하는 섬이 됐다.

 

‘성스러운 샘물’이라는 뜻을 지닌 티르타 엠풀은 발리 최고의 영적 성지다. 힌두교 전통 정화의식인 ‘멜루캇’을 경험할 수 있다.
‘성스러운 샘물’이라는 뜻을 지닌 티르타 엠풀은 발리 최고의 영적 성지다. 힌두교 전통 정화의식인 ‘멜루캇’을 경험할 수 있다.

 

이른 아침 사원으로 향하는 발리 현지인의 모습에서 관광지 풍경과 결이 다른 그들의 영적 일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이른 아침 사원으로 향하는 발리 현지인의 모습에서 관광지 풍경과 결이 다른 그들의 영적 일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사람을 머물게 하는 섬

발리를 유난히 좋아해 여행 때마다 그곳만 찾는 지인이 있다. 다른 여행지는 좀처럼 마음에 차지 않는지 시간이 날 때마다 다시 발리로 향한다. 발리는 한 번 빠지면 쉽게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리기 어려운 독특한 매력을 지닌 섬이다. 우리 역시 그 이유를 직접 느껴 보기 위해 발리로 한 달 살기를 떠났다. 한국이 한창 여름일 때였지만 남반구에 가까운 발리는 계절의 결이 달랐다.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한낮의 더위도 생각만큼 심하지 않았다. 발리의 겨울은 사람의 마음을 한층 느긋하게 만들었다.

발리는 인도네시아 소순다열도 서쪽 끝에 자리한 섬이다. 면적은 제주도의 약 3배에 이르고 지역마다 서로 다른 풍경과 개성이 촘촘하게 펼쳐진다. 적도에 가까워 연중 기온 변화가 크지 않은 열대몬순기후를 보이며 계절은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화산섬 특유의 비옥한 토양과 수백 년간 마을 공동체가 물을 함께 나누며 유지해 온 전통 관개시스템 덕분에 섬 곳곳에는 계단식 논이 발달해 있다. 이 풍경은 오늘날 발리를 상징하는 대표적 이미지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등재돼 있다.

발리가 지닌 매력은 하나로 설명되지 않는다. 따뜻한 기후와 화산, 정글, 계단식 논, 해변이 섬 안에 고르게 들어차 있다. 여행자는 짧은 시간 안에 전혀 다른 풍경을 차례로 만난다. 여기에 부담이 적은 물가와 잘 갖춰진 의료·인프라, 요가·웰니스 산업, 오랜 세월 외지인을 받아들여 온 개방적인 환대문화가 더해지며 발리는 장기 체류지로서 특별한 존재가 됐다. 집집마다 야자잎 제물을 바치는 의식인 ‘차낭 사리’부터 대규모 사원 축제에 이르기까지 일상에서 이어지는 힌두 의례는 발리만의 문화적 깊이를 또렷하게 보여 준다.


발리에서 걷다 보면 길 위에 놓인 ‘차낭 사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차낭 사리는 매일 신과 우주에 바치는 발리 힌두교의 기본적인 제물이자 감사의 표시다.
발리에서 걷다 보면 길 위에 놓인 ‘차낭 사리’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차낭 사리는 매일 신과 우주에 바치는 발리 힌두교의 기본적인 제물이자 감사의 표시다.


이슬람 사이에 자리한 신들의 섬

인도네시아는 전 세계에서 무슬림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이지만 발리는 섬 인구의 80% 이상이 힌두교를 믿는 섬이다. 이 독특함의 뿌리는 14~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343년 자와섬의 힌두 왕국이 발리를 정복하면서 힌두교를 믿는 자바의 귀족과 사제, 예술가들이 대거 발리로 이주했다. 15~16세기 자와섬에 이슬람세력이 급속히 확산되자 이를 피해 나머지 힌두 왕족과 승려도 잇따라 발리로 피신했다. 그 결과 힌두 왕국은 발리 안에서 500년 가까이 독자적인 통치를 이어 갈 수 있었고 발리는 인도네시아 군도에서 유일하게 이슬람화되지 않은 섬으로 남았다.

20세기 들어 발리 힌두교는 공식적으로 종교의 지위를 얻었다. 이어 발리 힌두교의 신년 기념일인 ‘녀피(Nyepi)’가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발리 힌두교는 이슬람, 개신교, 가톨릭, 불교, 유교와 함께 인도네시아가 인정하는 6대 공인 종교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발리가 유독 외국인에게 ‘제2의 고향’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온화한 날씨나 저렴한 물가 때문만은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외부인을 받아들이면서도 고유한 정체성을 지켜 온 섬의 오래된 성격이 오늘날 은퇴 이주자와 장기 체류자들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외국인을 적극 유치해 온 관광정책까지 더해지면서 발리는 더욱 강한 매력을 갖게 됐다.


창구·스미냑은 해변을 따라 수백 개의 서프스쿨, 렌털숍, 현지 서프가이드가 밀집해 있어 장비 없이 방문해도 누구나 쉽게 서핑을 즐길 수 있다.
창구·스미냑은 해변을 따라 수백 개의 서프스쿨, 렌털숍, 현지 서프가이드가 밀집해 있어 장비 없이 방문해도 누구나 쉽게 서핑을 즐길 수 있다.


발리 관광의 문을 연 호주

발리는 워낙 넓은 섬이어서 한 달 살기 지역을 고르는 데 고민이 많았다. 결국 우리가 선택한 곳은 사누르였다. 다른 지역에 비해 숙소가 저렴했고 생활물가도 부담이 덜했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일출과 함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 마음이 끌렸다.

남동부 해안의 사누르는 발리 관광 역사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서양식 호텔이 들어서며 초기 관광의 싹이 텄고, 이후 발리 최초의 고층 건물인 발리비치호텔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0층 규모의 마이애미풍 건물은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를 세계에 알리려는 상징이었지만 동시에 지역주민들의 반발도 컸다. 이 논란은 이후 신축 건물을 야자수 높이, 즉 15m를 넘지 못하도록 하는 건축규제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 발리의 낮은 스카이라인을 지키는 핵심 원칙으로 남아 있다.

이용객 확대의 결정적 전환점은 항공 인프라 확충이었다. 1960년대 발리 정부는 응우라라이 공항의 활주로를 확장하고 국제선터미널을 신축했다. 이후 국제선 운항이 시작되고 시드니 노선이 개설되면서 발리는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호주를 주요 해외 관광객 공급원으로 확보하게 됐다. 호주는 지금도 발리를 찾는 외국인 관광객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국가다.

이어 발리 관광종합계획이 수립됐고, 사누르를 비롯해 쿠타와 누사두아가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이를 통해 급증하는 호주발 관광객을 수용할 기반이 마련됐다. 이 조치는 발리문화가 관광에 잠식되지 않도록 하려는 이른바 ‘거점 개발’ 전략이었다. 새로운 관광특구가 확장되면서 사누르는 발리 안에서 한물간 관광지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초기에 구축된 안정적 인프라 덕분에 지금은 장기 체류자나 은퇴한 외국인 여행자에게 사랑받는 지역이 됐다.


웰니스 여행지의 성지 

2010년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가 큰 인기를 끌면서 우붓은 한국에도 널리 알려졌다. 영화 속 푸르른 계단식 논밭을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는 줄리아 로버츠의 모습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많은 이가 힐링을 찾아 발리 북쪽에 위치한 우붓으로 향했다.

사누르가 국가 주도의 ‘관광 관문’이었다면 우붓은 전혀 다른 경로로 세계에 알려졌다. 1927년 우붓의 왕가인 수카와티 가문이 서구 화가들을 초청하면서 우붓은 예술가들의 거처가 됐다. 이후 현지 예술가들까지 모여 발리예술가협회를 결성, 발리 미술세계를 해외에 알리는 통로를 마련했다. 이렇게 다져진 ‘문화예술의 수도’라는 정체성은 1960년대 본격적인 여행자 유입으로 이어졌다. 현재 우붓은 요가와 웰니스 여행의 대표적인 여행지로 자리 잡았으며, 이를 중심으로 채식식당도 크게 늘고 있다.

사누르와 우붓을 넘어 최근 가장 주목받는 지역은 창구와 스미냑이다. 벼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 가던 이 두 마을은 소규모 부티크호텔 건설, 클럽문화 발달, 서퍼들 사이에 퍼진 입소문을 계기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2010년대에는 디지털 노마드 문화까지 더해지면서 20~30대 여행객의 유입이 크게 늘었다. 특히 창구는 1990년만 해도 게스트하우스 몇 채에 불과했지만 2023년 기준 등록 숙박업소만 324곳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문한 관광객들. 이제는 이들이 발리를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방문한 관광객들. 이제는 이들이 발리를 위한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찾아왔다.


발리에서 배운 머무름의 태도

발리는 여행자가 머무는 방식까지 되돌아보게 하는 섬이다. 최근엔 창구와 스미냑 등 급성장지역에서 교통체증, 쓰레기 처리 문제, 지하수 고갈, 해안침식 같은 과잉관광의 부작용이 두드러지고 있다. 관광객에게는 편리한 시설과 활기찬 분위기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만 주민들에게는 교통체증과 생활비 상승, 자원 고갈로 돌아오고 있다. 최근 발리 주정부가 외국인 대상으로 입국세를 물리고 과밀지역에 신규 호텔, 빌라, 나이트클럽 등 상업시설 건설을 중단했다. 또한 장기 체류형 및 문화 존중형 관광객 중심으로 구조를 개편하고자 연간 방문객 수를 조절하는 ‘관광객 쿼터제’까지 논의 중이다.

오버투어리즘을 줄이고 현지인의 삶을 보호하려는 움직임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발리에서 한 달 살기나 장기 체류를 꿈꾼다면 단순히 머무는 기간을 늘리는 데 그치지 말고, 이곳을 대하는 태도까지 함께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랑받는 곳일수록 지켜야 할 것도 많아지는 법이다.

발리는 저렴한 휴양지도, 막연한 영적 낙원도 아니다. 인간과 자연, 신의 조화를 중시하는 고유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섬이다. 내가 머무는 시간이 현지 공동체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는지, 무심코 한 행동이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지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현지문화를 조용히 배우고 느슨해 보이는 일상에 자리한 규칙을 존중하며 머무는 것. 어쩌면 그런 태도야말로 발리가 여행자에게 허락하는 가장 깊은 쉼에 이르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오늘의 뉴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