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국가유산청이 함께하는 ‘두 발로 만나는 국가유산’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의 시간-선사 지질의 길
연천·포천·철원을 아우르는 한탄강…수십만 년 전 여러 차례 화산 폭발로 비경 만들어져 고석정·비둘기낭·화적연 ‘한 폭의 그림’…구석기 사람의 흔적 ‘전곡리 유적’까지 눈으로 확인하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경기 포천시 한탄강 세계지질공원 내 ‘비둘기낭폭포’ 전경. 화산활동에 의한 철원·포천·연천지역의 지질과 지형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어 천연기념물로도 지정돼 있다. 비둘기낭폭포를 중심으로 기둥 모양의 주상절리가 발달한 협곡이 장관을 이룬다.
지독했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어느덧 가을의 문턱에 섰다. 그 사이 국가유산의 가치와 매력을 소개하는 ‘두 발로 만나는 국가유산’ 기획시리즈도 벌써 여섯 번째를 맞이하며 반환점을 돌았다. 오늘 만날 ‘선사 지질의 길’은 우리 장병들과도 친밀한 곳이다. 바로 수많은 장병이 국가수호 임무를 수행하는 최전방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안보에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곳이지만 국가유산으로서도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경기 연천군·포천시와 강원 철원군까지 아우르는 ‘선사 지질의 길’을 소개한다. 글=노성수/사진=김태형 기자
서울에서 ‘선사 지질의 길’로 향하는 길은 비교적 수월하다. 서울 용산구 국방홍보원에서 차량으로 1시간20분 남짓 북쪽으로 내달리자 어느새 시원한 한탄강 물줄기를 따라 자리 잡은 ‘선사 지질의 길’에 도착했다.
‘큰 여울의 강’이라는 뜻의 한탄강은 세월이 깎아 놓은 현무암 협곡과 그 줄기를 따라 시작된 인류의 탄생과 선사시대 문화가 남아 있는 곳이다. 수십만 년 전 강원 철원군과 인접한 북한 평강군 오리산 일대에서 여러 차례 화산 폭발이 일어났고, 분출한 용암은 넓은 용암대지와 아름다운 한탄강을 만들었다. 불(용암)과 물(하천)이 이룬 아름다운 자연의 합작품인 셈이다. 2020년 ‘한탄강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한탄강 중류에 있는 고석정 정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철원 9경 중 하나로 꼽히는 고석정이었다. 고석정은 한탄강 중류에 있는 정자이자 그 주변을 아우르는 지역이다. 현무암 계곡 지형으로, 양쪽은 절벽이고 한쪽 강가에는 10m 높이의 고석이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한다. 지금의 정자는 6·25전쟁 당시 불타 없어진 걸 197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고석정 정자에서 내려다본 전경.
고석정에 다리를 뻗고 앉아 옥빛 강물 위로 통통배가 떠다니는 절경을 바라보니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특히 고석정이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조선 명종 때 활동한 의적 임꺽정의 근거지로 알려져 있어서다. 고석에 올라가 보면 좁은 틈이 벌어져 있는데, 그 안쪽 넓은 동굴에서 임꺽정이 몸을 숨기고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은 뒤 시원한 막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까지 채우고선 경기 포천시로 향했다. 한탄강 줄기를 따라 찾은 곳은 한탄강 세계지질공원이었다. 이곳에서 신비한 협곡 아래로 내려가면 이름부터 이색적인 ‘비둘기낭폭포’를 만날 수 있다.
‘비둘기낭’이라는 이름은 예부터 이곳 동굴과 암석 등에 멧비둘기가 많이 서식했다는 이유로 지어졌다. 비둘기낭폭포 주변에 4각 내지 6각의 기둥 모양으로 갈라지는 주상절리가 잘 발달한 협곡이 그야말로 장관을 이룬다. 무엇보다 화산활동에 의한 철원·포천·연천지역의 지질과 지형의 형성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가치까지 있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매미 떼 합창을 뒤로하고 비둘기낭폭포를 마주하니 폭포와 동굴, 맑고 오묘한 색깔의 물이 협곡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건 영화 속 특수효과로도 구현하지 못할 거야’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자연이 선사한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 채 차로 20분 거리의 또 다른 명소 ‘화적연’으로 이동했다.
화강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모습이 인상적인 화적연.
화적연은 볏짚단을 쌓아 놓은 듯한 연못을 뜻하는 순우리말 ‘볏가리소’라고도 불린다. 화강암 바위가 한탄강을 휘몰아치는 곳에 우뚝 솟은 모습이 마치 볏짚단을 쌓아 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붙여졌다. 화적연과 관련해선 농경사회에서 농사에 얽힌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그중 하나는 한 늙은 농부가 3년간 가뭄으로 하늘을 원망하며 연못가에 앉아 탄식하고 있었는데, 그때 화적연 물이 왈칵 뒤집혀 용의 머리가 쑥 나왔고 용이 승천하더니 그날 밤부터 비가 내려 풍년이 들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한 얘기이지만, 신비로운 기운이 가득한 장소임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화적연은 ‘조선시대 진경산수의 거장’ 겸재 정선의 그림에도 등장할 만큼 역사적인 장소다. 포천은 조선시대 도성에서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최단거리 노선인 경흥로가 지나고 있었다. 이에 정선은 금강산 가는 길에 명승을 그린 해악전신첩에 ‘화적연’을 남겼다. 화적연이 보이는 곳에 화적연 바위 안쪽에서 발견한 검은 돌을 여의주로 가공한 ‘여의주를 품은 화적연’이 있다. 방문객은 각자의 소원을 빌며 기분 좋은 상상을 해도 될 듯싶다.
연천 전곡리 유적 내 구석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재현한 전시물.
마지막으로 세계적인 구석기 유적인 연천 전곡리 유적을 찾았다. 이곳은 수십만 년 전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남긴 생활 흔적이 확인된 곳이다.
역사의 시작은 주한미군이었던 그레그 보엔의 남다른 눈썰미에 있었다. 미 공군 관측병이었던 그는 평소 고고학에 관심이 많았다. 1977년 그는 한탄강변에서 데이트를 즐기던 중 우연히 주변의 돌을 줍게 됐는데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곳의 돌 몇 점을 프랑스의 고고학자에게 자문했고, 이어 서울대 고고학과 김원룡 교수가 본격적인 조사에 팔을 걷어붙이게 됐다. 이 과정에서 발견된 아슐리안 주먹도끼는 동아시아에선 처음 발견된 역사적인 것이었다.
한탄강 일대에 분포하는 다양한 암석들.
총 17차례의 발굴조사 끝에 주먹도끼, 사냥돌, 주먹찌르개, 긁개, 찌르개 등 다양한 종류의 석기가 발견됐고 출토된 유물만 8500여 점에 달한다. 이는 전곡리 유적이 인류의 석기 제작기술과 이동경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됐다. 또한 유적 형성과정 고찰을 통해 구석기 연구방법론 발달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연천 전곡리 유적 곳곳에 구석기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여러 조형물도 설치돼 있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여행한 듯한 기분마저 느낄 수 있다.
사실 이번 방문 전까지만 해도 서울 인근에 천혜의 비경이 자리 잡고 있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선사 지질의 길’은 자연이 만들어 낸 예술품으로 가득한 황홀경 그 자체였다. 뜨거운 햇살도 삼킬 듯한 눈부신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