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종의 기원’
정유정 작가 동명소설 원작
잔인한 살인자 쫓던 주인공
잠자던 포식자 본능에 눈 떠
방관자에서 잠재적 목격자로
순식간에 바꿔 놓는 연출 탁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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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만들어지는’ 걸까. 아니면 ‘태어나는’ 걸까.
뮤지컬 ‘종의 기원’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두 번째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사람의 얼굴을 하고선 사람들 틈에서 밥을 먹고, 공부하고, 사랑하고, 농담하며 머물지만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우리와 전혀 다른 존재. 정유정 작가가 ‘프레데터’ ‘포식자’라고 이름 붙인 인간이자 비인간적 존재다.
정유정의 동명소설을 무대로 옮긴 ‘종의 기원’은 포식자 한유진을 해부한다. 유진이 새로운 인류의 시조라는 뜻은 아니다. 유진 이전에도 포식자는 있었고, 유진 이후에도 있을 것이다. 제목의 ‘기원’은 인류 최초의 포식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유진이라는 인간 안에서 오래 잠들어 있던 포식자가 어떻게 눈을 뜨고 자기 이름을 알아가는가. 그 기원을 좇는다.
이 작품에서 악은 어느 날 갑자기 베토벤의 운명처럼 문을 두드린 불청객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부터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유진에게 수영은 유일한 피난처다. 의사인 이모 김혜원은 그에게 뇌전증 진단을 내리고 오랜 기간 ‘리모트’라는 약을 먹이고 있다. 어머니 김지원 역시 아들의 생활을 엄격하게 통제한다. 도하 아시안게임 대표선발전에서 대회신기록을 세울 만큼 뛰어난 실력을 보인 유진은 중요한 경기에서 발작을 일으키고, 결국 가장 좋아하던 수영마저 빼앗긴다.
유진은 약을 끊고 몰래 외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죽은 형 유민과 빼닮았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입양해 가족이 된 김해진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깬다. 눈앞에는 피범벅이 된 어머니의 시신이 있다.
이제 극은 살인자를 찾아 달리기 시작한다. 유진은 기억의 빈칸을 더듬고 주변 사람을 의심하며 자신에게 감춰진 과거를 파헤치는데, 이상하게도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범인과의 거리는 멀어지지 않고 짧아진다. 마침내 한 걸음도 남지 않는다. 유진이 찾아낸 것은 범인인 동시에 자기 자신이었다.
여기서 ‘종의 기원’은 이야기를 뒤집는다. 보통이라면 “내 안에 이런 괴물이 있었다니” 하고 무너져야 할 순간이지만, 유진에게 자기발견은 오히려 해방에 가깝다. 어머니와 이모는 유진의 악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독한 약과 규칙, 감시로 통제해 왔던 것이다. 결국 유진조차 알지 못했던 자신 속에서 포식자가 고개를 들고 만다.
악인이 만들어진 게 아니다. 잠자던 포식자가 눈을 떴을 뿐이다.
이 발상을 무대에서 풀어낸 방법이 흥미롭다. 유진은 한 명인데 배우는 둘이다. 유진1과 유진2는 같은 무대에 서서 마주 보고, 말을 주고받고, 밀어내고, 상대가 미처 꺼내지 않은 생각까지 알아챈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일을 두 개의 육체로 끄집어낸 것이다.
둘을 착한 유진과 나쁜 유진으로 나누면 작품은 평평해지고 만다. 그보다는 이성과 본능, 사회 안에서 길든 자신과 억눌린 포식자, 자신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유진과 그것을 훨씬 먼저 알고 있는 유진의 관계로 읽는 편이 재미있다. 두 유진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압권은 피날레다. 극 내내 이성과 무의식으로 분리돼 대립하던 2명의 유진이 마침내 하나로 합쳐진다. 이 합일은 심리적 불안이 해소되는 긍정적 치유가 아니다. 억압받던 포식자의 본능이 자아를 완전히 지배했음을 뜻한다.
완성된 ‘나’는 포식자다. “저것도 나인가”라는 의심이 “저게 나다”는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 두 유진이 떨어져 있을 이유는 사라지고 만다. 자기기만의 시간은 끝났다.
커튼콜 후에도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에필로그가 남아 있기 때문인데 완성된 포식자 유진은 마지막 넘버 ‘심판자’를 부른 뒤 어두운 무대 뒤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객석으로 내려와 계단을 오르고, 마침내 관객의 뒤편 출입문으로 나가 버린다. 관객이 안전한 자리에서 구경하던 포식자가 우리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이다. 무대를 떠난 포식자는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유유히 스며들어 버렸다.
관객을 방관자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잠재적 목격자로 순식간에 바꿔 놓는 멋진 연출이다.
이 작품은 한유진 역에 남녀 배우를 함께 기용하는 젠더프리 캐스팅을 하고 있다. 이번 시즌에서는 기세중, 이종석, 김이후, 신은총, 김려원, 변희상, 정재환, 박상혁이 2명의 한유진을 나눠 맡았다. 내가 본 회차에선 김이후와 김려원이 두 유진으로 만났고 최민경이 김해진, 류비가 김지원과 김혜원을 맡았다.
김이후와 김려원은 2인극 뮤지컬 ‘해적’(2023)에서도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김이후가 ‘유진1’, 김려원이 ‘유진2’였는데 두 유진이 마주칠 때마다 무대가 서늘해졌다.
이모 역을 맡은 류비는 유튜브 코미디 채널의 매력적인 직장상사 역으로 기억하는 이가 많을 것 같다. 본업은 뮤지컬 배우로, 작품활동도 활발하다. 뮤지컬 ‘삼총사’의 악녀 밀라디 역을 맡은 적도 있다.
뮤지컬 ‘종의 기원’은 오는 9월 20일까지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에서 공연한다.
공연은 끝났다. 그런데 손에 잼이 묻은 것처럼 개운하지 않다. 저 문 뒤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본 듯도 하다. 웃음소리도 들렸던가. 관객은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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