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역사] 불의에 의로써 일어나다

입력 2026. 08. 17   16:04
업데이트 2026. 08. 17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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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와 대한민국 국군의 군사역사
① 국군의 군사역사 전통의 서막과 김구의 치하포 의거 
② 의병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③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④ 시대를 앞선 대한민국 군대 
⑤ 또 다른 독립전쟁, 의열활동과 그 기록 
⑥ 국군의 군사교육으로 정예 국군 양성 
⑦ 한국광복군의 독립전쟁 
⑧ 광복과 함께 광복군에서 국군으로

의로운 삶 지향했던 21세 청년
국모 시해한 일본인 처단 ‘의거’
의를 위해 창의한 의병 호국전쟁
을미의병·을사의병·정미의병…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전통 만들어

국방일보는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 유네스코 기념해를 맞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함께 김구의 독립활동과 국군의 군사역사 및 전통을 정리하는 연재기획을 총 8회에 걸쳐 진행합니다. 8월 15일 광복절부터 9월 17일 광복군 창설일, 10월 1일 국군의 날까지 이어지는 뜻깊은 기간 동안 ‘국군의 뿌리와 역사적 전통’을 조망함으로써 ‘김구의 역할과 의미’를 살펴봅니다. 정리=서현우 기자

1946년 마곡사를 방문한 김구와 이시영 일행. 출처=마곡사
1946년 마곡사를 방문한 김구와 이시영 일행. 출처=마곡사


김구의 독립의거 출발점, 치하포 의거 

1896년 3월 8일 매서운 겨울 날씨에 김창수라는 21살의 청년이 용강군에서 안악군 치하포(?河浦)로 건너기 위해 배를 탔다. 대동강은 찬 바람에 얼어 빙산이 배를 가두는 일이 발생했다. 여러 사람을 독려해 얼음을 헤치고, 치하포의 나루터 여관에 묵게 된 김창수는 여관방에서 단발하고 한복을 입은 일본인을 발견했다. 말투와 숨긴 칼을 보고 국모를 시해한 일본인 미우라라 판단한 김창수는 응징하여 국가의 치욕을 씻어 보고자 했다. 미우라를 제압하고 처단한 김창수는 “국모보수(國母報讐)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라는 포고문을 벽에 붙여 자신의 의거를 천하에 밝혔다.

김창수는 해주옥을 거쳐 인천감리서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다. 1897년 사형이 확정됐지만, 반일의거에 대한 한국인의 공감과 고종의 특별사면령으로 집행이 중지됐다. 다음 해 3월에 김창수는 탈옥해 삼남으로 도피하고, 늦가을에 마곡사(麻谷寺)에서 원종(圓宗)이란 법명으로 지냈다. 이후 1900년 김구로 개명하고,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교육활동에 참여했다. 장련 광진학교·봉양학교, 문화 서명의숙, 안악 양산학교 등에서 교육했으며, 1919년 상해로 망명하기까지 교육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치하포 의거는 김구의 삶에서 유학, 불교, 동학의 사상적 정립과정을 통해 의로운 삶을 지향했던 독립의거의 출발점이었다. 김구의 독립의거는 향후 대한민국임시정부 한인애국단의 의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김구의 첫 의거였다.


의로운 삶을 추구한 김구


백범(白凡) 김구(金九)는 동학에서 시작해 통일된 한국을 지향했던 독립지사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으로 독립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구는 1876년의 8월 29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낙원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김구가 태어난 시점에 집안은 가난했지만, 김구는 부모와 여러 스승의 격려를 받아 시대인식을 키워갔다.

극심한 부정행위의 과거시험을 접고, 사람의 살아가는 마음에 대한 궁리에 몰두하는 과정에 하늘님을 통한 도를 행하고, 존비귀천을 없애고, 새 국가를 건설한다는 교리에 감동하여 1893년 동학에 입도했다. 하늘과 통하고 평등한 새로운 국가 건설 열망으로 동학접주로 군사활동에 나서게 됐다.

1894년 김구는 해주성전투에서 패배해 의려장(義旅長) 안태훈, 안태훈의 모사(謀師)인 고능선과 인연을 맺게 됐다. 김구는 고능선으로부터 유학을 접하고, 의(義)를 위한 죽음은 신성하게 망하는 것이고, 아부하여 항복함은 더럽게 망하는 것이란 논리를 정립했다. 이는 김구의 삶과 독립인생에 결단과 실행의 기준이 됐다.

김구의 의를 중심으로 한 행동론은 치하포에서 을미사변으로 국모를 시해한 스치다 조스케를 처단한 치하포 의거로 표출됐다. 의거라는 점은 김구가 치하포 의거 이후 숨어 도망하지 않고 의거 현장에 ‘국모복수의 목적으로 이 왜인을 죽이노라. 해주 백운방 텃골 김창수(金昌洙)’라는 글을 남기고, 고향 집에서 기다렸다가 체포된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시대의 위기 극복하고 창의한 의병의 전쟁

개항 이후 서구열강의 침투는 조선의 역사적 전환을 초래했다. ‘병자수호조약’과 개항, 임오군란, 갑신정변으로 이어지는 개항 이후 근대화의 갈등은 조선의 능동적인 역사발전을 끌어내지 못했다. 결국 서구를 배척하고 조선의 자강을 목적으로 한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1894년, 일본에 의해 청일전쟁을 빌미로 군사적으로 강점받는 상황에 놓였다. 특히 박은식이 『한국통사(韓國痛史)』에 밝혔듯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한 의병이었다.

의를 위해 창의한 의병의 대일 전쟁은 개항 이후 수행된 호국전쟁으로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으로 이어졌다. 일본의 강점에 대응한 의병은 전근대의 근왕과 연결되지만, 근대 국민국가의 인식을 포함하면서 안중근 의사가 천명했듯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의군(義軍)이라 할 것이다. 1895년에서 1896년까지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대응해 창의한 을미의병, 1904년에서 1907년까지 을사늑약에 항거한 을사의병, 1907년에서 1910년까지 군대해산과 병합에 대응한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의병전쟁은 독립전쟁의 서막이었다. 한국 군사역사에서 국군은 의병, 독립군, 광복군의 역사적 전통과 정신을 계승한 국민의 군대다. 그 출발점으로 의병전쟁은 한국 군사역사의 근대적 역사전개에서 시발점의 의미가 있다.


대한의 이름으로 독립을 천명

청일전쟁, 을미사변, 아관파천의 사건을 경험한 한국인은 일본의 군사강점에 분노했다. 한국인의 의병전쟁의 정당성은 한국의 군사역사에서 불의한 침략과 강점에 맞선 의로운 대응이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의로운 의병전쟁에서 독립된 국가체제의 천명이 필요했다. 1897년 10월 11일, 아관파천에서 복귀한 고종은 새로운 역사전환을 준비했다.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하고, 새로운 국호선정을 논의했다. 고종의 입장에서 기존의 정치체제와 열악한 현실적 조건을 개혁할 명분과 의제가 필요했다. 이에 고종은 우리나라가 대대로 삼한의 땅으로, 대내외적으로 ‘대한(大韓)’이란 국호가 적합하다고 천명했다.

10월 13일,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로 하늘의 뜻을 받들어 천하에 반포하는 첫 조령을 반포했다. ‘대한’이란 국호 선정의 의미를 강조한 조령에서 국가 위기상황에서 대한제국을 반포해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다고 했다. 또한 관원의 탐학을 경계하고, 관리와 군사를 위무하여 대한제국의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고자 했다.

한국 군사역사에서 ‘대한’이란 국호의 첫 등장이자, 국가 차원의 독립이란 용어를 제시해 현실적 자주국가의 허약한 기반을 극복하고자 했다. 이후 한국인이란 자각의식과 일본의 군사강점에 대응해 독립이란 목표점이 정당화됐다. 대한제국의 조령은 역사적 선언으로 이후 한국 군사역사에서 독립전쟁의 바탕이 됐다.

일본인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한국인이라 인식하고,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서 확인되듯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의군, 즉 의병의 지휘관으로 적국의 수괴를 처단했음을 천명했다. 일본의 불법적인 병합에 대응해 민족적 혁명으로 일어난 3·1만세운동에서 한국인은 “대한독립 만세”를 부르짖었다.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으며, 제국이 아닌 국민의 국가, 민국을 건국해 역사적 의미를 가져왔다.


한국 군사역사 전통, 국군의 역사·전통으로 

19세기 서구열강의 침투로 시작된 근대화의 역사에서 한국 군사역사는 변화의 격동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군사강점 시작점이자 한국인의 독립전쟁으로 의병전쟁이 전개된 시점으로, 한국 군사역사와 국군의 역사에서 의병전쟁의 출발점이다. 비록 국가의 체제는 왕국, 제국, 민국으로 전환됐지만, 근대화과정에서 한국인이 국가로 인식하는 국호는 ‘대한’으로 정착됐다. 제국의 한계로 일본에 강점됐지만, 한국인은 의병전쟁에서 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군사역사의 전통을 만들었다.

한국 군사역사의 전통과 국군의 역사에서 그 출발점은 동학농민전쟁과 의병전쟁이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으로 본격화된 을미의병은 그 첫 단추다. 21세의 청년은 동학농민전쟁과 중국과의 연계를 위해 활동하고, 그의 독립여정 전환점으로 치하포 의거로 출발했다. 김구의 독립의거는 청일전쟁, 을미사변의 불의에 의로 창의한 의병전쟁의 서막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한인애국단에서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전개한 의열활동의 앞선 모습이었다.

 

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경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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