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도시이야기
스페인 마요르카와 인도네시아 발리 上
쇼팽이 남겨둔 빗방울 선율을 지나
오렌지 열차가 달리는 고요 속으로…
은퇴 후 삶의 터전 된 독일인 ‘제2의 고향’
소나무숲·올리브밭 펼쳐진 마요르카의 산맥
연중 푸르게 빛나는 지중해 온화한 햇살 아래
팔마의 경이, 오렌지 열차에 실어보낸 낭만
마요르카는 스페인 영토이지만 독일인에게 더 익숙한 섬이다. ‘독일의 17번째 주’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오랫동안 독일 휴양객의 사랑을 받아 왔다.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가장 흔히 마주치는 여행자는 호주인이다. 이들 역시 은퇴 후 발리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나라를 떠나 마요르카와 발리로 삶의 터전을 옮긴 사람들의 정착과정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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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럽인은 마요르카로 향하는가
마요르카에서 한 달을 머물기까지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리가 선택한 8월은 이 섬의 가장 치열한 성수기였다. 물가는 치솟았고, 숙소는 부족했으며, 날씨마저 미친 듯이 더웠다. 그럼에도 발걸음을 돌리지 못했던 이유는 지중해의 빛을 그대로 머금은 듯한 투명한 마요르카 바다 때문이었다. 바다에 매료된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거리에선 스페인어보다 독일어가 더 자주 들렸다. 이곳이 스페인의 섬인지, 독일인의 휴양지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독일인의 마요르카 사랑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경제성장기와 함께 시작됐다. ‘라인강의 기적’으로 부를 축적한 독일 중산층은 1950~1960년대 전세기 항공편과 패키지여행을 통해 마요르카로 대거 유입됐다. 이 시기 독일 자본이 현지 호텔을 인수했고, 독일 여행사와의 계약을 바탕으로 다양한 패키지상품이 만들어지며 큰 성공을 거뒀다. 여기에는 외화 확보를 위해 국경을 개방하고 관광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정권의 정책도 큰 영향을 미쳤다. 민간 호텔업자와 독일 여행사의 협력이 정부의 관광 개방정책과 맞물리면서 독일은 자연스럽게 마요르카 관광시장의 최대 고객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마요르카는 단순한 휴양지를 넘어 독일인의 생활권에 가까운 공간이 됐다. 독일어 신문이 발행되고 독일 유치원과 병원, 전통 빵집까지 들어서며 사실상 ‘독일 정착 생태계’가 형성됐다. 비행기로 2~3시간이면 닿는 뛰어난 접근성과 ‘마요르카에서는 독일어만으로도 생활할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 역시 독일 은퇴자들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마요르카는 스페인 발레아레스제도의 중심 섬으로 제주도의 약 2.5배에 이르는 면적이다. 섬의 북서쪽을 따라 해발 1400m급 트라문타나산맥이 길게 뻗어 있으며, 이 산맥이 섬의 지형을 양분한다. 산맥 일대에는 소나무숲과 올리브밭이 펼쳐지고 반대편의 평원지대에선 무화과와 살구, 오렌지, 아몬드 재배가 활발하다.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로 연중 맑은 날이 많은 편이지만, 겨울엔 기온이 낮고 바람이 거세다. 이에 여행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늦봄에서 초가을로 꼽힌다. 그중에서도 여름이 최고 성수기다.
유럽 본토에서 비행기로 2~3시간이면 닿는 접근성,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서의 제도적 안정성, 비교적 낮은 범죄율 역시 이 섬을 은퇴 이주지로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조건이다. 다만 여름 성수기마다 반복되는 극심한 관광 혼잡, 일부 해안지역의 소음과 물 부족 문제, 최근 강화된 단기임대 규제로 인한 숙박 불확실성은 마요르카가 안고 있는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다.
독일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사람들을 사로잡은 마요르카의 매력은 다양하다. 산악과 해안, 평원이 한 섬 안에 공존하는 입체적인 지형부터가 큰 경쟁력이다. 하이킹과 해수욕은 물론 골프와 사이클링 등 다양한 야외활동을 즐길 수 있다. 여기에 20세기 초부터 유럽의 작가와 예술가들이 머물며 쌓아 온 문화적 명성, 260여 곳에 이르는 해변과 크고 작은 만, 팔마를 중심으로 발달한 요트 마리나 문화까지 더해지며 마요르카만의 독특한 매력을 완성한다.
쇼팽과 상드가 머문 발데모사
우리는 마요르카에서 한 달간 대중교통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정액권을 구입해 들고 다녔다. 발데모사는 팔마 시내에서 버스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평지를 달리던 버스는 시내에서 벗어나자 곧 굽이치는 산길을 따라 오르막을 올랐다. 그렇게 트라문타나산맥 속 마을에 들어서면 우리가 익히 아는 음악가 쇼팽의 흔적과 마주하게 된다.
마요르카를 세계에 각인시킨 인물 가운데 한 명은 프레데리크 쇼팽이다. 1838년 겨울 쇼팽은 연인이자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와 함께 이 섬을 찾았다. 결핵을 앓던 그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에서 요양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지만, 마요르카의 겨울은 예상과 달랐다. 그해 섬에는 이례적인 폭우와 혹독한 추위가 이어졌고, 팔마에 머물려던 계획도 틀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결핵을 두려워해 쇼팽을 꺼렸고, 결국 두 사람은 트라문타나산맥 기슭의 조용한 마을 발데모사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들은 수도원 빈방을 빌려 머물렀지만, 난방조차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열악한 환경에서 쇼팽은 각혈과 함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시기 그의 음악은 가장 깊고 섬세한 결을 얻었다.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파리에서 들여온 피아노로, 쇼팽은 이곳에서 ‘24개의 전주곡 Op.28’을 완성했다. 특히 제15번 ‘빗방울 전주곡’은 수도원 지붕을 두드리던 마요르카의 겨울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같이 머물던 상드는 훗날 이 시기의 고단한 체류 경험과 섬의 때 묻지 않은 자연을 담아 수필 ‘마요르카의 겨울’을 펴냈다. 이 기록은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마요르카를 유럽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다. 오늘날 발데모사 수도원 일부는 박물관으로 운영되며, 쇼팽의 친필 악보와 피아노가 전시돼 있다.
400년 걸쳐 완성된 팔마 대성당
마요르카의 역사는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에 편입된 과정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10세기 초(902~903) 이슬람세력에 정복된 뒤 약 300년간 무어인의 지배를 받았던 이 섬은 1229년 아라곤왕국의 원정으로 다시 기독교세력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이후 이슬람사원이 있던 자리에 성당 건립이 추진됐고, 약 400년에 걸쳐 완성된 팔마 대성당 ‘라 세우(La Seu)’는 오늘날 마요르카를 대표하는 상징이 됐다.
이 성당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지름 14m에 달하는 고딕양식의 장미창이다. 매년 2월 2일과 11월 11일 아침이면 햇빛이 장미창을 통과해 맞은편 벽에 투영되며 ‘8자 모양의 빛’ 현상이 나타난다. 이 장관을 보기 위해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이른 아침부터 성당을 찾는다. 20세기 초에는 카탈루냐를 대표하는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가 10년가량 성가대석 이전과 채광 개선 등 내부 복원작업을 맡아 오늘날 성당의 모습에 중요한 흔적을 남겼다.
성당이 위치한 팔마 시내는 전 세계에서 모인 여행자로 한시도 조용할 틈이 없다. 팔마는 마요르카섬의 행정·경제·교통 중심이다. 우리 역시 다른 지역으로 여행하기 위해 매일 이곳을 들러 버스를 탔다. 팔마 터미널과 기차역을 거쳐 마요르카섬 어디나 이동할 수 있다. 그중 북쪽 항구도시 소예르로 향하는 일명 ‘오렌지 익스프레스’ 노선은 1912년 첫 운행을 시작해 지금도 달리고 있다.
화물열차에서 관광열차로
소예르는 유독 해변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우리도 일주일에 한 번은 열차를 타고 소예르 해변으로 향했다. 열차 노선 ‘오렌지 익스프레스’에는 고풍스러운 목조 마감과 황동장식, 수동식 창문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탑승하는 순간 100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독특한 오감의 경험을 선사한다. 지금은 멋진 관광상품이 됐지만, 본래 목적은 오렌지 수송이었다.
소예르 분지는 예전부터 기후가 온화하고 토양이 비옥했다. 18~19세기에는 마요르카 최고의 오렌지와 감귤류, 올리브 생산지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거대한 트라문타나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섬의 중심지인 팔마에 가려면 험준한 산악 고개를 마차와 나귀에 의지해 온종일 넘어야 했다. 이로 인해 당시 소예르 주민들은 스페인 본토보다 오히려 배편이 편한 프랑스 마르세유 등과 더 활발히 교류했을 정도다.
마요르카의 오렌지 무역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고립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감귤류를 팔마의 대규모 시장과 항구로 신속하게 보내야 해서다. 이때 신대륙 등지에서 큰돈을 벌고 고향으로 돌아온 자산가들, 이른바 ‘인디아노스’가 등장했다. 이들은 신대륙의 산업철도로 철도 부설의 사업적 가능성을 확인한 뒤 철도 건설회사를 설립했다. 이후 소예르의 황금빛 오렌지를 전 유럽으로 수출하기 위해 협궤 노선 ‘오렌지 익스프레스’를 건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동차와 도로 인프라가 급격히 보급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느리고 적재량에 한계가 있는 협궤열차는 화물 운송 경쟁력을 잃었다. 화물 물동량은 빠르게 도로망으로 옮겨 갔고, 기차는 만성 적자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독일을 비롯한 유럽 패키지 여행객이 마요르카로 몰리면서 이 열차는 오렌지 대신 여행자를 태우는 관광상품으로 되살아났다.
쇼팽이 머물렀던 발데모사의 고요함, 팔마 대성당의 경이로운 아름다움, 소예르로 달리는 오렌지 열차의 낭만이 어우러지며 마요르카는 오랫동안 유럽인의 사랑을 받아 왔다. 마요르카는 단순히 ‘휴가를 보내는 섬’을 넘어 ‘살고 싶은 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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