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일보 광복 81주년 특별 기획] 우리 손으로 이뤄낸 '빛의 회복'
아시아·아프리카·중동…
수많은 나라가 열강의 지배하에 있던 1943년
카이로선언에 유일하게 독립 보장된 대한민국
“노 젓지 않는 배는 움직이지 않는다”
끊임없는 독립운동·무장투쟁의 결과
피땀으로 정당성을 증명한 주체적 승전보였다
우리는 매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는다. 나라를 되찾은 날이다. 그런데 왜 ‘독립기념일’이 아닐까?‘광복(光復)’은 빛을 되찾는다는 의미다. 빼앗겼던 국권과 주권, 민족 정통성을 다시 회복했다는 능동성을 갖는다. 자연스럽게 우리 선조들의 끊임없는 투쟁과 반만년 역사의 연속성을 내포한다. 반면 ‘독립’은 연합국의 승리로 얻은 결과라는 의미로 축소,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이전 역사와의 단절이란 오해로 이어질 수도 있다. 결국 ‘광복’은 남이 준 선물이 아닌, 끊임없는 투쟁으로 되찾은 주체적 역사의 결과라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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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을 처음 의제로 올린 카이로회담
제2차 세계대전 중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독립이 처음으로 거론된 것은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회담’이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 중국의 장제스 총통이 모여 일본에 대한 대응과 아시아 전후 처리 원칙을 논의했다.
회담 결과로 발표된 카이로선언에는 ‘(미국, 영국, 중국) 3개국은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절한 절차를 거쳐 한국을 자유 독립되게 할 것을 결의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일본이 패망할 경우 한국의 자유 독립을 보장한 중요한 선언이었다.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수많은 국가가 열강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하지만 주요 연합국 수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독립을 보장한 국가는 대한민국이 유일했다. 당연히 이들 열강들의 단순 호의 때문은 아니었다. 우리 선조들의 치열한 대일투쟁의 결과였다. 목숨을 걸고 싸운 임시정부와 독립투사들의 독립의지를 인정한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 총통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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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카이로회담을 앞두고 장제스를 만나 한국 독립의 의제 포함을 강력하게 요청해 이를 성사시켰다. 초반 임시정부의 활동에 소극적던 장제스 총통은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우리의 독립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중국 입장에서도 전후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제하고 우방국을 확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독립을 지지할 필요가 충분했다. 장제스는 이러한 국제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1953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고, 역사적으로 해당 훈장 1호 외국인 수여자로 이름을 남겼다.
‘카이로선언’에서 우리의 독립 약속은 미국의 전후질서 구상 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당시 열강의 식민지 유지를 비판하면서 단계적으로 식민국을 독립시키는 신탁통치 구상을 가졌다. 이에 한반도를 신탁통치의 실험대로 삼으면서 강대국 간의 충돌을 막는 역할로 특별히 언급했다는 시각이다. 하지만 이 역시 미주 독립지사들의 다각적 외교 노력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란 평가다.
이외에도 카이로회담 참가국들의 본래 목적인 ‘일본의 침략 영토 박탈’이라는 명분에 주목하는 국제법적·역사적 관점도 있다. 카이로선언 전문에는 ‘일본이 강탈하거나 점령한 만주와 대만은 중국으로 반환하고, 태평양 도서 지역은 몰수한다’는 내용이 있다. 대한민국은 특정 국가로 반환되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래의 상태인 독립 국가로 돌아갈 대상이었다는 해석이다.
이 모든 학설의 바탕에는 선조들의 목숨을 건 대일 항쟁이 있다. 노 젓지 않는 배는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 열강들은 독립을 위해 투쟁하지 않는 민족을 위해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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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두드린 항일투쟁의 역사
독립투쟁은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경술국치 이전부터 시작됐다.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키자 이에 항거하는 의병들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을 계기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화하자, 전직 관료와 농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의병활동에 나섰다. 특히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이후 전국13도 의병부대가 서울로 진군하는 ‘서울 진공 작전’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하면서 한계를 드러냈다.
‘경술국치’ 이후 의병 활동은 더욱 가열차졌다. 전국에서 일어난 수많은 지사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무대를 넓혀서 개인별 또는 조직적으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많은 의병부대는 중국 만주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 기반을 두고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1911년 만든 신흥강습소를 발전시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고, 이곳에서는 조국의 광복을 목표로 인격을 연마하고 군사지식을 배양한 인재들을 길러냈다. 결국 이들의 결사항전은 후에 독립군 결성과 중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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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독립 이끄는 선두에 선 임시정부
1919년 전국으로 뻗어나간 3·1운동은 대내외적으로 일제 식민통치의 부당함과 대한민국 국민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알린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비폭력 무저항 운동으로 독립을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당시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 지도부의 부재를 한계로 절감했다. 이에 여러 형태로 나뉘었던 정부형태를 하나로 통합,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헌장을 제정하고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 수립은 봉건제를 극복한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라는 측면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이전 독립운동은 몰락한 조선왕조의 복원을 목표로 했다. 봉건제로의 회귀였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왕정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을 표방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민주공화제 헌법을 최초로 채택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외로 분산돼 있던 독립운동 역량을 하나로 모아 외교, 군사, 재정, 교육 등 다방면에서 항일투쟁을 총지휘했다. 1945년 광복까지 약 26년간 독립운동의 중심을 지켰다. 현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성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기반으로 무장투쟁 준비에도 박차를 가했다.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으로 선포하고 병력 모집과 군사간부 양성을 위한 기반 마련에 나섰다.
당시 각자 활동 중이던 독립군 부대들도 적극적으로 나서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에선 열악한 화력과 장비를 극복하고 일본군을 대파하기도 했다.
1931년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 산하에 한인애국단을 창설하며 무장투쟁을 이어갔다. 당시까지 독자적인 군대 편성이나 군대를 이끌 지도부 편성이 힘들었기 때문에 선택한 차선책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이봉창 의사의 일왕 히로히토를 향한 폭탄 투척에 이어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으킨 거사로 당시 많은 일본군 장교를 처단하면서 큰 성과를 거뒀다.
투쟁 넘어 전쟁으로, 광복군의 등장
일본군의 공격을 피해 중국 곳곳을 떠돌던 임시정부는 1940년 중국 충칭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5일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인 군대를 창설했다. 광복군은 정신적으로 대한제국군을, 인적 구성으로는 독립군을 계승했다. 이후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 대일 항전의 구심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1941년 12월 1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면서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독립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계획이었다. 1943년 8월부터 1945년 7월까지 영국군과 공동작전으로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대일항전을 벌였다. 전쟁 막바지였던 1945년에는 미국중앙정보국(CIA) 전신인 전략사무국(OSS)을 통해 조직적인 훈련을 받고 미군과 함께 한반도 침투 작전을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에 따른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은 최종 무산됐다. 김구 주석은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광복군의 활약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려던 의지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또한 광복군 조직은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의 뼈대가 됐다.
광복은 수동적 선물 아닌 우리가 쟁취한 역사
군사편찬연구소 발행 도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은 임시정부가 연합국과 합작하려 했던 이유에 대해 승전국이자 교전단체로 승인받기 위한 외교적 노력의 하나였다고 설명한다. 이 같은 노력은 카이로선언 등과 같은 국제사회로부터 ‘적당한 시기에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하는 성과를 촉진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결국 대한민국의 광복은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국의 승리로 얻어진 수동적 결과물이 아니다. 우리 민족이 수십 년간 쉼 없이 펼쳐온 자강 노력이 결실을 맺은 자발적 쟁취의 역사라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전문가들은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국내외를 아우르며 전개된 독립운동과 무장투쟁이 없었다면 광복의 정통성과 독립국가 수립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3·1운동을 시작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봉오동전투·청산리대첩, 그리고 한국광복군의 연합국 공동작전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민족의 끈질긴 저항은 세계 무대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각인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결국 1945년 8월 15일 맞이한 ‘빛의 회복’은 외세에 의해 주어진 불로소득이 아닌, 피와 땀으로 독립의 정당성을 증명해낸 우리 민족 스스로의 주체적 승전보로 평가받고 있다. 배지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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