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청궁,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현장
조선 첫 전등 밝힌 곳에서 벌어진 어두운 역사
고종이 가장 아낀 ‘궁궐 안의 궁’
을미년 새벽 日 낭인 담장 넘을 때
경비대는 달아나고 연대장은 피살
고립무원 공포 속 죽임당한 왕비
그날의 절망·분노·치욕 느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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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북쪽 깊숙한 곳에 있던 건청궁은 1873년 지은 별궁으로, ‘궁궐 안의 궁’이었다. 1887년 첫 번째 전등을 이곳에서 켰을 정도로 왕이 좋아했던 공간이다. 고종의 거처 장안당과 명성황후의 처소 곤녕합, 어진(御眞) 보관용 옥호루 등으로 구성했다. 1895년 10월 8일 이곳에서 왕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발생했다. 구보는 이 사건을 생각할 때마다 비애에 사로잡힌다. 일국의 왕비를 낭인들이 칼로 베고 불에 태우는 천인공노할 만행이 자행됐는데도 아무런 저항을 하지 못한 당시의 무력함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고종은 친정 체제를 갖추면서 군대 조직을 대폭 없앴다. 대원군의 흔적을 지우고 싶었던 까닭이다. 1882년 구제 병사 차별이 야기한 군란을 청나라의 힘을 빌려 겨우 진압한 이후로는 군대의 존재가 희미해졌다. 일본 낭인들이 새벽 5시에 신무문·춘생문·취규문 쪽에서 사다리로 담벼락을 넘어 궁궐 안으로 진입하자 경복궁 경비대는 겁에 질려 달아나 버렸다. 궁내부대신 이경직이 곤녕합 기둥 밖에서 살해당하고 훈련대 연대장이던 홍계훈이 광화문 밖에서 살해당했다(『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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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계훈은 13년 전 임오군란 때 황후를 업고 피신시킨 바 있었으나 끝내 황후와 운명을 함께했다. 황후는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가운데 죽임을 당한 후 근처 숲에서 불에 태워졌다. 구보는 곤녕합 마당에 서서 황후가 겪었을 고립무원의 절망감과 공포, 분노, 치욕을 떠올려 본다. 사변의 내용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영국 공사 힐리어 등 외교관의 정보보고에 담겼다. 사건 두 달 후 이곳을 찾아 조사한 우치다 일본 일등영사도 지도 표기를 첨부해 같은 내용을 본국 외무성에 보고했다(『일한외교사』).
10월 15일 왕실은 자체적으로 곤녕합 사변의 실기를 발표했다. “총리 김홍집과 내부대신 유길준 등 의정부의 흉적들이 미우라와 결탁해 8월 20일 인정(寅正)쯤에 일본 병사와 2훈련대의 앞잡이가 되어 곧바로 대내(大內)를 침범하여 곤녕합으로 밀고 들어가니, 입직하던 신료들은 막아 저지하지 못하고 위졸들은 거의가 직분을 지키지 못하였다(『승정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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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는 건청궁 앞 향원정 벤치에 앉아 황후를 죽음으로 몰고 간 당시의 국제 정세를 떠올려 본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에서 요동반도가 일본에 할양됐으나 1895년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 3국이 간섭하고 나서자 일본은 거부할 힘이 없다고 판단해 요동을 청국에 돌려준다. ‘3국 간섭’으로 러시아의 힘을 목격한 조선에서는 이완용·민영환·윤치호 등 소위 ‘정동파’가 황후를 앞세워 친러 정책을 추진한다.
이 무렵 황후는 러시아 공사 카를 베베르 내외와 긴밀히 접촉하며 조선 조정 내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로 뜻을 같이한다. 고종은 “조선의 독립과 왕권을 보장한다”는 러시아 공사의 설득에 마음을 빼앗기면서 친러로 노선을 전환했다. 1894년 청일전쟁 후 청으로부터 조선 종주권을 넘겨받은 일본이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옥죄어 오자 고종은 1882년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의 ‘환난 시 필수 상조’ 항목에 기대 조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중립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보였다(『The Pigrail War』). 갈팡질팡하던 고종이 러시아에 매달리게 된 배경이었다. 남진정책을 펴던 러시아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졌다.
조선의 친러 정책은 러시아 진출을 저지하려 협력하던 영국과 일본의 대외정책에 정면으로 배치됐다.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왕비의 영향력을 제거해야 한다’고 보고 황후 시해를 계획한다. ‘조선 조정이 권력 다툼으로 대립상을 보이고 있으며, 백성과 유리돼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일본은 이 계획을 위해 대원군을 끌어들였다. 미우라 공사는 “김홍집·어윤중·김윤식을 중심으로 내각을 구성하며, 대원군의 핏줄인 이재면과 이준용을 중용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 있던 대원군의 동조를 얻어냈다.
일본은 즉각 행동에 들어가 남산 예장동 일본공사관에서 을미사변을 모의한다. 작전명은 ‘여우 사냥’으로 정했다. 아다치 겐조가 경영하던 한성신보사 소속 수십 명의 낭인과 일본 공사 관할이던 조선군 훈련대를 앞세웠다. 일본 가담자들은 당일 새벽 마포 아소정에 기거하고 있던 대원군을 찾아가 고유문을 결재받고 거사에 돌입했다(『한국 왕비 살해 일건(一件)』 제2권, 일본 외무성). 을미사변은 그렇게 벌어졌다.
시해 사건이 알려지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의 기의는 비록 ‘폐정의 주역’이긴 했으나 한 나라의 국모였기 때문에 국가와 국민의 자존심을 살리려 함이었다. 정치의 사유화를 일삼으며 나라를 파국으로 몰아갔지만 ‘시해를 당하면서 면죄부를 받은 셈(『매천야록』)’이 됐다.
미우라는 이 사건을 조선의 내정 문제로 처리하고자 했다. 왕비의 군대 해산 결정에 불만을 품은 조선군 부대가 대원군의 힘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미우라의 시도는 왕궁에 있던 두 목격자에 의해 들통난다. 미국인 군사 교관인 윌리엄 맥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건축 기사 알렉산드르 사바친이었다. 때마침 서울에 와 있던 ‘뉴욕 헤럴드’ 특파원 코크릴이 이들의 제보를 듣고 기사를 타전함으로써 일본의 만행은 서방에 알려진다.
1896년 1월 14일 일본은 군법회의를 열어 미우라 고로 일당을 심판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무죄 석방했다. 단지 “일본인이 왕궁 습격과 황후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밝혔다(『明治天皇』, 도널드 킨).
미우라의 만행으로 반일의 중심이던 황후는 제거됐으나 조선 정부는 친러 노선을 포기하기는커녕 더욱 가속화했다. 구보는 외세에 물어뜯기는 입장이어서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고종 정부가 국제 정세에 무지했다고 여긴다.
이런 무지가 정부 기능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아관파천’이라는 오류로 이어지면서 줄곧 러시아를 견제하던 세계 최강 영국을 자극해 일본의 조선 병합을 묵인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09년 일제는 건청궁을 헐었고, 30년 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다. 현재 민속박물관이 들어선 곳이다. 1951년 이승만 대통령이 ‘명성황후조난지지’라고 직접 쓴 비석을 옥호루 터에 세웠다. 이 비석은 건청궁 복원에 따라 2004년 이후 고궁박물관 수장고에 옮겨졌다.
구보는 건청궁을 바라보며 내부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외세는 늘 그 틈을 파고든다는 아픈 진실을 곱씹어 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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