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르완다 ④
평화유지군으로 파견된 벨기에군
10명 포로됐다 탈출과정 전원 전사
10개 추모비 품은 추모기념관 변신
지금도 집단 매몰 유해 수시로 발견
공식 문서 종족 구분 법적으로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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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대학살 사건 당시 르완다에 주둔한 유엔군은 2628명이었다. 사령관은 캐나다군 로메오 달레르 소장이었고, 벨기에군은 정예로 꼽히는 코만도 2대대 450명을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온건파인 후투족 르완다 여성 총리 우윌링기이마나의 경호 임무도 부여받았다. 우윌링기이마나 총리는 필사적으로 광란의 학살극을 막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중무장한 르완다군은 벨기에군을 무장해제시킨 뒤 총리와 가족을 살해했다. 그리고 포로로 잡힌 10명의 벨기에 코만도 대원들은 키갈리 군사기지로 압송됐다.
벨기에군 혈투 현장의 추모기념관
1994년 4월 초 키갈리의 민심은 흉흉했다. “벨기에군이 대통령기를 격추했다”는 유언비어에 속은 르완다인들은 벨기에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참다못한 코만도 대원들은 육탄전으로 무기를 빼앗아 기지 건물 속으로 탈출했다. 곧이어 총격전이 무려 3시간 동안 계속됐다. 수백 대 일의 전투였지만 대원들은 누구 한 사람 무릎 꿇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 발의 수류탄이 날아들면서 저항하던 코만도 대원들은 전원 전사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벨기에는 르완다에서 철수했고, 유엔 평화유지군까지 축소됐다. 이후 100만 명의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이 학살당해도 누구 한 사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오늘날 처절한 격전 현장은 벨기에군 추모기념관으로 변했다. 건물 벽에는 무수한 탄흔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건물 내부에는 수류탄 파편 자국과 함께 벨기에에서 공수해 온 추모 비석과 화환이 있었다. 기념관 정원에는 전몰장병들을 상징하는 10개의 추모비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20세 내외의 전사자 나이를 고려해 추모비석의 높이를 약간씩 달리했다.
사투 중인 장병을 방치한 사령관
기념관에는 사건 당시 긴박했던 유엔군의 상황일지도 있다. 다음은 상황일지에 적힌 1994년 4월 7일 새벽 벨기에군 작전 경과다.
오전 1시18분 사령관은 제2코만도 대대에 르완다 총리를 경호하라고 명령했다. 오전 2시16분 로탱 중위는 병력 9명과 지프 4대를 이끌고 출발했다. 무질서한 시내를 가까스로 통과해 총리 관저 부근에 도착했지만 광기 어린 민중에게 제지당했다. 오전 5시42분 르완다군이 관저를 향해 총탄을 퍼부었다. 하지만 대대본부는 일절 대응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오전 6시55분 르완다군이 무장해제를 요구했지만 로탱 중위는 단호히 거부했다. 오전 9시경 강제로 벨기에군을 무장 해제시킨 르완다군은 대원들을 키갈리 군사기지로 압송했다. 몽둥이와 정글도로 무장한 군중의 집단 폭행으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잔여 코만도 대원들은 필사적으로 기지 건물 안으로 대피해 항전 태세를 갖췄다. 오전 10시50분 회의장으로 이동 중이던 유엔군 사령관은 불과 30m 떨어진 기지 정문 앞을 지나갔다. 그는 사망한 유엔군 일부 시신을 목격했지만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시간에 6명의 벨기에군은 영내에서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오후 1시경 르완다군은 건물 지붕 속으로 최루탄과 수류탄을 집어넣었다. 이로써 코만도 대원 6명의 최후 저항은 끝을 맺었다.
학살 희생자의 안식처 ‘키갈리 추모 공원’
키갈리 언덕의 추모 공원에는 수만 명이 안장된 지하 묘역이 있다. 르완다에서는 아직도 건설공사 때 수시로 집단 매몰 유해가 발견된다. 2019년에는 190기의 무연고 유골이 이곳에 봉안됐다. 안내인은 믿기 어려운 사례를 들려줬다.
“후투족인 엄마가 자신이 살기 위해 투치족 혈통의 아이들을 민병대에 신고했다. 르완다는 부계사회다. 아버지가 투치면 자녀도 투치족이다. 당연히 인종청소 대상이었다. 엄마가 학살팀에 신고한 4명의 아이 중 3명은 살해당했다. 그러나 1명은 기적적으로 탈출해 그 실상을 증언했다.”
1994년 세계 언론은 ‘실존하는 지옥을 보려면 르완다에 가보라’고 보도했다. 대학살 후 투치족 인구는 30만 명으로 줄었다. 한 세대가 지난 지금은 300만 명으로 늘어났다. 끈질긴 투치족의 생존력이다. 추모공원 인근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재잘거리며 나오는 아이들은 한국 초등학생과 전혀 다를 바 없다. 사진을 찍자고 하니 10여 명의 꼬맹이가 달려왔다. 한결같이 까까머리다. 환호 속에 촬영이 끝나자 1학년 꼬마가 “기브 미 머니(Give me money)”라고 당당하게 출연료를 요구했다. 돈을 주지 않으면 한국까지 따라오겠다는 각오로 손을 꽉 잡는다. 고사리 같은 그의 손에 다른 아이들 모르게 약간의 용돈을 쥐여줄 수밖에 없었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국가 재건정책에 활용된 ‘마을 법정’
1994년 대재앙 이후 르완다는 사법·행정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됐다. 법적 절차로는 수십만 명에 달하는 가해자 재판은 불가능했다. 대학살 사건의 피의자만 12만 명이 넘었다. 정규 재판에 따른다면 100년이 소요됐다. 결국 주민들이 직접 재판관을 선출하는 오랜 전통의 ‘가차차(Gacaca) 마을법정 제도’를 활용토록 했다. 판결 핵심은 ‘진실 고백’이었다. 가해자가 범죄사실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피해자 시신 위치를 알리면 형량을 크게 감경했다. 1200개의 마을 법정에서 10년간 190만 건의 사건을 처리했다. 비극의 씨앗이 됐던 신분증의 종족 기재도 전면 폐지했다. 공식 문서에서 종족 구분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르완다는 이런 치유 정책을 통해 재보복의 연쇄 고리를 끊고 신속하게 국가를 안정시켜 나갔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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