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가나 엘미나성…대항해시대 흑인 노예무역의 ‘아픈’ 유적지
포르투갈, 금 교역 독점 위해 건설
16C 플랜테이션 노동력 절실해지자
총기 등 물자로 현지 포로 사들여
노예선 태우기 전 지하감옥에 수용
경제시설인 동시에 군사기지 역할
17C 서구 열강 각축장으로 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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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중 패권 전쟁이란 말은 거의 보통명사처럼 쓰인다. 그럼에도 21세기 세계의 헤게모니는 여전히 미국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미국이 가진 힘의 원천은 어디일까? 바로 19세기 유럽에서 꽃피운 산업혁명이었다. 이에 앞서 18세기 중엽 영국은 어떻게 산업혁명에 불을 붙일 수 있었을까? 여러 요인이 있지만 아프리카 흑인 노예무역을 통한 자본 축적이 선행됐기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항해시대 노예무역의 잔혹사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 유적 중 하나가 아프리카 가나 해안에 1482년 포르투갈이 세운 엘미나성(Elmina Castle·1979년 세계문화유산 지정)이다.
모든 세계문화유산이 인류 문명의 영광만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유산은 인간의 탐욕과 폭력, 문명의 어두운 이면을 기억하기 위해 보존된다. 아프리카 가나의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엘미나성도 그런 곳이다. 푸른 바다를 마주하며 서 있는 이 성은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해양 진출을 상징하는 요새인 동시에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자유를 빼앗긴 채 신대륙으로 끌려간 대서양 노예무역의 출발점이었다.
15세기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상업이 발전하면서 후추와 계피, 정향 같은 동방의 향신료 수요가 급증했다. 이들 물품은 아라비아와 이탈리아 상인을 거쳐 유럽에 들어왔기에 매우 비쌌다. 더구나 1453년 오스만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동방으로 향하는 육상 교역로는 더욱 불안정해졌다.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고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해상 항로 개척이 절실해졌다.
이에 가장 먼저 부응한 나라가 포르투갈이었다. 비록 작은 국가였지만 대서양에 면한 긴 해안선을 가진 포르투갈은 일찍부터 항해술을 발전시켜 왔다. 특히 ‘항해왕자’ 엔히크의 적극적 후원 아래 국가 차원의 해양 탐험을 추진했다. 그는 직접 항해에 나서기보다 항해사와 지도 제작자, 조선기술자를 지원·육성하며 장기적인 해양전략을 추진했다. 목표는 이슬람 상인들의 중개무역을 거치지 않고 서아프리카의 금을 확보하고, 궁극적으로는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캐러벨 범선과 천문항법의 발전에 힘입은 포르투갈 탐험대는 아프리카 서해안을 따라 남하했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 가나 해안에서 내륙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금이 유입·거래되는 한 지역을 발견했다. 이른바 나중에 유럽인이 ‘황금해안(Gold Coast)’으로 부른 곳이었다. 포르투갈은 이 귀중한 교역거점을 독점하기 위해 1482년 해안의 암반 위에 대규모 석조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것이 바로 엘미나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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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미나성은 단순한 교역소가 아니었다. 두꺼운 성벽과 포대, 병영, 창고, 행정시설, 예배당까지 갖춘 복합 군사기지였다. 해안을 향해 설치된 대포는 항구를 통제했고 성은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는 포르투갈 함대의 보급기지이자 해상 패권을 유지하는 전략거점이 됐다. 포르투갈은 이곳으로 집결한 서아프리카산(産) 금과 상아를 유럽으로 실어 나르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역사는 곧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1482년 완공된 엘미나성은 원래 노예를 거래하기 위해 세워진 시설은 아니었다. 당시 포르투갈의 관심은 오직 황금해안에서 생산되는 금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엘미나(Elmina)’라는 이름도 포르투갈어 아 미나(A Mina), 즉 ‘광산’ 또는 ‘금광’을 뜻하는 말에서 유래했다. 황금을 확보하기 위해 세운 이 성은 16세기 접어들어 신대륙 플랜테이션 경제가 성장하면서 전혀 다른 역할을 맡게 됐다. 아메리카에서 사탕수수와 담배, 면화를 재배할 노동력이 절실해지자 유럽인이 눈을 돌린 곳이 바로 서아프리카였다. 그 결과 엘미나성은 황금을 저장하는 창고에서 인간을 가두는 감옥으로 변모했다.
당시 아프리카에도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는 관습은 존재했지만 유럽의 노예무역은 이를 전혀 다른 규모의 국제적 사업으로 바꿔 놨다. 유럽 상인들은 총기와 화약, 직물 등을 제공하는 대신 현지 세력이 확보한 포로들을 사들였다. 이로써 아프리카 내륙에선 다양한 부족 간에 사람을 얻기 위한 전쟁과 약탈이 빈번해졌다.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이 아니라 시장에서 가격이 매겨지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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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미나성 내부에는 매입한 남녀를 구분해 수용하는 지하감옥이 설치됐다. 노예들은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비좁은 공간에서 출항을 기다렸고, 이후 일명 ‘돌아올 수 없는 문’을 지나 대서양에 정박한 노예선에 올랐다. 이들에게 그 문은 가족과 고향, 자유와 영원히 이별하는 마지막 경계선을 상징했다. 이곳을 통과한 사람 거의 대부분이 다시는 아프리카 땅을 밟지 못했다. 이어지는 대서양 횡단 항해는 한마디로 ‘지옥’ 그 자체였다. 노예들은 몸을 제대로 펼 수도 없는 선창에 쇠사슬로 묶인 채 수주에서 수개월을 견뎌야 했고 굶주림과 질병, 폭력 속에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브라질과 카리브해, 북아메리카의 농장과 광산으로 보내져 평생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형성된 대서양 삼각무역은 근대 세계 경제의 토대가 됐다. 유럽은 공산품을 아프리카에 보내 노예를 구매하고, 노예들은 아메리카에서 설탕과 담배·면화 등을 생산했으며, 이들 상품은 다시 유럽으로 운반돼 막대한 부를 창출했다. 산업혁명의 원인을 노예무역 하나로 설명할 순 없지만 플랜테이션 경제와 대서양 교역이 유럽의 자본 축적과 세계무역의 성장에 크게 이바지한 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처럼 엘미나성은 경제시설인 동시에 군사기지 역할을 했다. 이곳은 곧 서구 열강의 각축장으로 변했다. 포르투갈에 이어 17세기에는 네덜란드가 성을 점령했고, 이어 영국과 프랑스도 서아프리카 해안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
아프리카가 치러야 했던 대가는 너무나 컸다. 노예를 확보하기 위한 전쟁과 약탈이 반복되면서 많은 공동체가 붕괴했고, 젊고 건강한 인구가 지속해 해외로 유출됐다. 이는 단순한 인구 감소를 넘어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침체를 심화시켰다. 이처럼 대서양 건너편에서 달성한 번영의 이면엔 다른 한 대륙의 희생이 놓여 있었다.
오늘날 엘미나성은 더 이상 황금을 저장하는 창고도, 노예를 가두는 감옥도 아니다. 이 성은 대항해시대 해양활동을 보여 주는 유산인 동시에 인류가 결코 잊어선 안 될 노예무역의 ‘흑역사’를 증언하는 기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세계문화유산은 아름다운 유적만을 보존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인류 역사 속의 영광과 비극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 가는 데 진정한 가치가 놓여 있음을 가나 해변의 ‘엘미나성’은 웅변하고 있다.
필자 이내주는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명예교수이자 한국군사문제연구원 객원연구위원으로 영국 근현대사와 군사사를 전공했다. 현재 연세대학교 사학과 객원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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