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광해군의 긴 침묵이 남은 곳
인조반정으로 폐위돼 강화도 유배
마지막 기착지 제주서 4년여 생활
예순여섯의 나이로 영욕의 생 마감
승하한 날인 음력 7월 1일만 되면
불볕더위에 비 와 ‘광해우’라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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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북동쪽 구좌읍은 환해장성 너머로 푸르른 바다가 전개되는 곳이지만, 한적하고 평화로운 풍광은 비운의 임금 광해군의 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구보는 풍력발전기들이 들어선 행원리 바닷가에 서서 1637년 6월 6일의 모습을 그려본다. 사방을 온통 검은 천으로 가린 돛단배가 들어오고 한 노인이 관원들의 팔에 이끌려 어등포 포구에 내린다. 북서풍이 세차게 불던 날이었다. 노인은 자신이 다다른 곳이 절해고도임을 알게 되자 크게 낙담한다. 왕의 제주 유배는 초유의 일이었다. 그렇게 광해 임금은 제주섬으로 들어왔다.
광해 이혼(李琿)은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선조는 방계 혈통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열등감을 안고 있었고, 정비 의인왕후에게서 후사를 얻지 못한 채 서자들 가운데서 세자를 골라야 하는 처지였다. 그 선택은 오래 미뤄졌다. 정철이 경연 자리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주청했다가 선조의 진노를 사 유배를 당하는 일까지 벌어진 이후, 후계 문제 거론은 더욱 금기시됐다. 이 상황을 뒤바꾼 것은 전쟁이었다. 1592년, 왜군이 부산에 상륙해 빠른 속도로 북상해 오자 4월 29일 선조는 서둘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충주성이 함락되고 사흘 뒤면 한양에 들이닥칠 형국이었으니, 국가의 중대사인 책봉례를 서둘러 치러야 했다. 피란이 워낙 다급했던 탓에 세자 책봉 교서는 평양에 이르러서야 반포됐다.
선조는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결단하고 세자에게 권력의 일부를 주며 전장을 맡겼다. 광해군은 평안도·함경도·강원도·황해도를 전전하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했다. 무군사(撫軍司)를 이끌고 직접 야전을 누비기도 했다. 이 때문에 민심이 선조를 떠나 광해군에게 쏠리는 현상이 벌어졌다. 7개월간의 짧은 분조였지만 임진왜란 초반 가장 치열했던 격전기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힘을 보탰고, 이 헌신은 훗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됐다.
그러나 아들의 성가(聲價)가 높아질수록 부왕의 시기도 깊어졌다. 선조는 명나라 장수를 접견하는 자리에 형 임해군을 일부러 동석시키는가 하면 계비에게서 영창대군을 얻어 세자의 지위를 끊임없이 흔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1608년, 즉위한 광해군은 전란으로 무너진 나라의 골조부터 다시 세웠다. 경기도에 특산물이 아닌 쌀로 납세하게 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양전을 실시했으며, 폐허가 된 한성부의 질서를 되살리기 위해 창덕궁 중건에 힘을 쏟았다. 초기에는 당쟁의 폐해를 익히 알아 남인계와 서인계 인사를 두루 등용하며 붕당을 다독이려 했으나,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파의 반발에 막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제는 그 대북파가 광해군의 즉위 자체를 떠받친 세력이었다는 데 있었다. 적자도 장자도 아닌 데다 영창대군이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이어서 권력 기반이 취약했던 광해군에게 대북파는 없어서는 안 될 정치적 배경이었다. 이 관계는 곧 피의 옥사로 이어졌다.
대북파는 1613년 서출 일곱 명의 역모 사건을 계기 삼아 영창대군의 옹립 혐의를 진술로 유도해 그 외조부 김제남까지 옭아맸고, 여덟 살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해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이듬해 봄 강화부사로 하여금 살해하도록 했다. 1618년에는 법적 어머니 신분인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했다. 이 ‘폐모살제(廢母殺第)’는 패륜으로 비판받으며 서인 세력의 반발을 더욱 부채질하는 결정타가 됐다(한국학중앙연구원).
그 시기 만주의 누르하치가 여진을 통일해 후금을 세우고 명을 공격했다.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택했다.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3000명의 원병을 보내면서도 후금의 감정을 자극하지 말고 정세에 맞춰 행동하라고 지시함으로써 강홍립은 항복한다. 광해군은 이후로도 명의 거듭된 원군 요청을 요령껏 물리치며 후금과의 친선을 도모하는 중립노선을 견지했다. 이 실리외교는 명나라에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당시 사대 세력들의 거센 비난을 사며 훗날 인조반정의 한 명분이 됐다.
1623년 3월 반정군의 기습에 광해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왕실 최고 어른이던 인목대비에 의해 패륜과 배명(背明)의 죄로 폐위된 그는 강화도로 유배됐다. 이듬해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잠시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도로 돌아왔고, 병자호란이 터진 뒤에는 교동도로 이배됐다. 인조는 패륜아로 낙인찍힌 숙부를 죽이면 반정의 명분을 잃는 탓에 그를 계속 살려뒀다. 광해군은 그렇게 15년을 지내다가 1637년 5월 비밀리에 먼 제주로 이배됐다. 청(淸)이 새 종주국이 되자 청에 우호적이었던 폐왕을 고립시킴으로써 후환을 없애려는 인조정부의 계산이 작용했다. 다른 유배자들과 달리 조천이 아닌 어등포로 입도했고, 적거지도 제주목 관아 근처로 지정했다(『남환박물』). 구보는 인조 정부가 광해를 예의주시했음을 읽는다.
폐주는 적소에서 궁녀나 아전에게 수모를 당하자 화를 내기도 했으나 이내 대응을 삼간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연려실기술』). 구보는 그 침묵이 두 살 때 생모를 잃은 사람이 세상을 헤쳐오는 과정에서 터득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으로 여긴다.
광해는 4년을 더 버티다 1641년 음력 7월 1일 예순여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8년간의 유배에 종지부를 찍던 날이었다. 그 후 제주에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이날만 되면 비가 내리곤 해 사람들이 ‘광해우(光海雨)’라 불렀는데, 지금껏 제주 민요에 전한다. “칠월이라 초하룻날은, 임금대왕 관하신 날이여, 가물당도 비오람서라(가물다가도 비가 오더라).” 그날의 비를 ‘광해의 눈물’이라 여긴 것이다. 정작 죽음의 순간, 광해가 남긴 말은 반정 세력에 대한 원망도 복위의 미련도 아니었다. “내가 죽으면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달라”는 한마디였다.
광해군이 숨을 거두자 목사 이시방은 곧장 봉해둔 문의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 예를 갖춰 염빈했다. 한양에서 내려온 예조참의 채유후가 제주목 관덕정에서 대제를 지낸 뒤 제주도에 장사지냈다. 광해군의 유해는 고인의 유언을 좇아 2년 후 경기 남양주 진건읍 송능리로 옮겨졌다(『광해초상록』). 1577년 먼저 들어선 생모 공빈 김씨의 묘는 성릉(成陵)에서 성묘(成墓)로 강등돼 있었다. 영욕이 함께하는 세월을 살았던 광해군의 마지막은 어릴 때 여의어 한으로 남았던 어머니 발치의 작은 묘역이었다.
묘역에서 구보는 갑자기 청 태종에게 머리를 땅에 찧으며 용서를 빈 ‘삼전도의 치욕’ 때 인조의 뇌리에 혹시 광해군의 얼굴이 떠오르지는 않았을지 궁금해졌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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