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찬란했던 사흘 마지막 궁중의 기억

입력 2026. 08. 06   15:50
업데이트 2026. 08. 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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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21 경복궁에서 벌어진 조선의 마지막 연회: 임진진찬도

대한제국 직전, 국호 ‘조선’의 마지막 왕실 행사
외진찬, 내진찬, 야진찬 등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고종 30년’ 사흘간의 연회 생생하게 병풍에 담아
더없이 화려한 임진년의 기록이자 뼈아픈 근대사

'고종임진진찬도( 高宗任辰進饌圖 )', 8폭 병풍, 비단에 채색, 세로 167×가로 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종임진진찬도( 高宗任辰進饌圖 )', 8폭 병풍, 비단에 채색, 세로 167×가로 51㎝.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종임진진찬도’에는 근정전에 도열한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고종임진진찬도’에는 근정전에 도열한 군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2년 9월 24일(음력)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실의 큰 잔치가 열렸다. 늦가을에 열린 성대한 연회는 고종의 망오(望五·41세)와 즉위 30주년을 기념했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고종(1852~1919, 재위 1864~1907)과 명성황후(1851~1895), 당시 왕세자인 순종(1874~1926, 재위 1907~1910)이 등장한다.

‘임진진찬도’는 임진년(1892)에 진찬을 올린 의식을 그린 조선 왕실의 기록화다. 진찬은 음식을 올린다는 뜻으로, 궁궐의 잔치 중 하나다. 조선의 국가통치법인 오례(五禮) 중 경사스러운 예식인 길례(吉禮)에 속한다. 따라서 준비를 위한 임시부처인 도감(都監)이 설치되고, 이에 대한 기록을 의궤와 계병(契屛)으로 남긴다.

의궤는 일종의 행사를 위한 결과보고서라고 생각하면 쉽다. 행사 날짜, 참석 인원, 배치도, 행사 내용, 물품, 담당 부서, 소요 인원, 예산 등 세부적인 요소까지 정리해 활자로 인쇄했다. 심지어 어떤 음식과 그릇을 사용했는지까지 자세하게 적어 한 장씩 넘기다 보면 조선시대의 기록물에 대한 경외감을 느낄 수 있다.

궁궐 행사는 의궤를 바탕으로 다시 그림을 그려 병풍으로 제작했다. 이는 당시 행사에 관여했던 왕실과 주도한 신하들이 나눠 갖는 그림이다. 병풍에는 주요 행사의 장면을 넣고, 계병의 왼편에 이를 주도했던 관리들 이름을 크게 적어 놓았다. 그림은 도화서 화원이 맡고, 글씨는 사자관(寫字官)이 써서 수준 높은 왕실 문화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임진년 진찬은 1892년 9월 24일부터 26일까지 사흘간 총 5번에 걸친 축하연을 베풀었다. 대상에 따라 행사를 지칭하는 명칭이 조금씩 다른데 왕, 신하, 종친, 척신 등이 참석하는 외진찬과 함께 대비나 왕비를 중심으로 내명부와 외명부가 참여하는 왕실 가족 중심의 내진찬으로 나뉜다. 그리고 행사의 실무를 주관했던 왕세자가 신하들과 함께하는 회작(會酌)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림을 보자. 임진진찬도 병풍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분된다. 오른편부터 근정전에서 왕과 왕세자, 문무백관이 거행했던 외진찬(9월 24일, 묘시: 아침 5~7시), 강녕전에서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이 참여한 내진찬(9월 25일, 진시: 아침 7~9시), 내진찬 행사가 밤까지 이어진 야진찬은 이경(二更·밤 9~11시)까지 지속됐다. 야연은 지붕 끝 차일 아래 등을 매달아 놓은 것으로 밤을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행사를 주관한 왕세자와 신하들이 여는 왕세자 회작(會酌·9월 26일 진시)을 볼 수 있다. 뒤이어 야연(夜宴)도 이경에 열렸지만, 이 장면은 병풍에는 실리지 않았다. 병풍의 왼편 끝에는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을 적어놓았는데, 당시 민씨 세력의 중심인물로 민영휘(閔泳徽·1852~1935)의 개명 전 이름 민영준(閔泳駿)이 보인다. 이와 함께 조선시대 첫 주미대사를 지낸 박정양(朴定陽·1842~1905)의 이름도 볼 수 있다.

병풍에는 생생한 사흘간의 장면이 기록돼 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임금에게 절하는 신하들을 비롯해 궁중 연회에 보이는 갖가지 화려한 기물과 장식품, 잔칫상을 볼 수 있다. 월대 위에 특별하게 설치된 무대에는 궁중정재가 시연되고 있다. 무대 양쪽에는 의관을 갖추고 이를 관람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주요한 조선왕실 회화에는 이러한 행사도에 왕이나 왕실 사람들을 직접 그리지 않고 대신 왕을 상징하는 일월오봉병 병풍, 대비나 왕비 뒤에 설치되는 십장생도 병풍 등으로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림 속 비어 있는 화문석 자리는 의궤를 보면 누가 어디에 앉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근정전 어좌 근처를 호위하는 무예별감(武藝別監), 내별군관(內別軍官), 월대 주변의 궁궐을 호위하는 금군(禁軍)으로 내금위(內禁衛)와 우림위(羽林衛), 겸사복(兼司僕) 등 당시 군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군인들의 복장이 혼재됐다. 전통 복장에 칼을 차고 있는 군인과 신식 군인 복장인 진회색의 군복에 총과 창을 드는 모습이 같이 그려져 있다. 1892년 개화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 이후 소실돼 오랫동안 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 고종이 즉위하면서 섭정 흥선대원군 주도하에 1865년부터 1868년에 중건했다. 고종의 즉위 30주년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에 친부인 흥선대원군의 자리는 없었다. 경복궁을 중건한 해 1868년 강녕전에서 열린 신정왕후의 팔순 잔치인 ‘무진진찬도병’(1868)에서 왕실 주요 인사로 자리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1873년 성인이 된 고종이 직접 집권하면서 아버지와의 불화가 시작됐다. 당시 대원군은 고종과 왕비, 외척인 민씨 일가와 끊임없이 권력을 다투며 서로의 목숨을 위협하는 관계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고종 즉위 30주년이 되던 해인 1892년 봄 당시 흥선대원군이 머물던 운현궁에 자객이 들고, 화약이 터진 사건이 수록돼 있다. 고종의 친모인 부대부인이 아들 고종에게 간청했지만 고종은 이를 외면했고 사람들은 배후를 명성황후로 지목했다. 비록 야사이긴 하지만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이들의 관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임진년(1592) 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경복궁을 중건하고, 다시 임진년(1892)을 맞이한 왕실의 행사는 ‘조선’의 국호로 행했던 마지막 왕실 행사가 됐다. 1894년 경복궁의 서쪽 건청궁에서 일본인 자객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896년 일본 감시를 피해 고종과 왕세자였던 순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외세에 숨 가쁘게 쫓기던 조선의 왕은 다시 경복궁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리고 1897년 10월 지금의 덕수궁(경운궁)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꿨다. 더없이 화려했던 임진년의 기록화를 보며 뼈아픈 우리의 근대사를 되짚어본다.


필자 한세현은 서울디자인재단 DDP 전시팀에서 전시 기획 및 교육 운영을 담당했다. 현재 미술사를 공부하고 있으며 국가유산청 문화유산감정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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