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살 촉발 지점, 예술 통한 치유 공간으로

입력 2026. 08. 04   15:04
업데이트 2026. 08. 04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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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르완다 ③ 

대통령 전용기 추락한 관저
일부 동체 남겨둔 채 미술관 변신

대학살 지옥으로 변한 성당…
아이들에 던진 수류탄 흔적 그대로
‘기억하다’ 플래카드 무색하게
학살기념관 찾는 발길은 줄어들어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 전용기 피격 사건은 대학살의 도화선이 됐다. 당시 르완다 정부는 투치족 반군과의 내전을 끝내기 위해 평화협정을 추진 중이었다. 바로 이날 르완다 대통령은 탄자니아에서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전용기가 국제공항에 착륙하기 직전 발사된 2발의 지대공미사일로 탑승객 12명 전원이 사망했다. 사건 발생 수 시간 후 극우 후투족과 대통령 경호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투치족 소행으로 단정하면서 학살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미사일 발사 주체가 누구인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폭우로 진흙탕이 된 도로를 복구하는 농민들.
폭우로 진흙탕이 된 도로를 복구하는 농민들.


키갈리 교외 답사와 오토바이 사고

키갈리를 벗어난 자동차 차창 밖의 시골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르완다는 농업국이다. 풍부한 비, 수많은 저수지와 습지는 벼, 채소, 옥수수 재배에 최적의 조건이다. 르완다는 연간 강수량이 1000~1400㎜에 달한다. 언덕 골짜기는 물이 머무는 천연 저수지다. 일시적인 폭우가 쏟아진 뒤 경사길과 급커브에서 가끔 오토바이 사고 현장이 목격됐다. 오토바이가 주 교통수단인 르완다에서는 사고가 빈발할 수밖에 없다. 특히 영업용 오토바이는 신호 위반, 무리한 차선 변경, 중앙선 침범이 일상화돼 있다. 키갈리는 언덕 경사가 가파르고 굽은 도로가 많다. 내리막길 과속사고와 노면이 미끄러워질 때 제동력을 잃고 넘어지는 사고가 빈발한단다. 또한 오토바이 기사들이 정체된 자동차 사이 공간으로 빠져나가는 습관이 고착돼 있다. 자동차의 차선 변경이나 출입문 열림 시 충돌 위험이 매우 크다.



느타라마 대학살 기념관 옆 식당에 남아 있는 수류탄 피격 흔적.
느타라마 대학살 기념관 옆 식당에 남아 있는 수류탄 피격 흔적.


전용기 추락 현장이 치유 공간으로

키갈리 국제공항에서 4㎞ 정도 떨어진 곳에 옛 대통령 관저가 있다. 수 개의 건물과 정원을 갖춘 소박한 숙소였다. 이 건물 옆의 공터가 대학살을 촉발한 전용기 추락 지점이다. 당시 화염에 휩싸인 항공기는 관저 정원과 담장 주변으로 떨어지면서 폭발했다. 이 관저는 현재 국립미술관으로 변신했다. 담장 너머에는 항공기 엔진과 일부 동체가 그대로 남아 있다. 잔해물 근처까지 갈 수는 있지만 사진 촬영은 통제됐다. 2009년 이 비극적인 장소는 ‘대통령궁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최고 권력자의 은밀한 비밀의 방들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정부는 ‘예술을 통한 상처 치유’라는 미래지향적인 가치를 추구했다. 드디어 2018년 5월 18일, 대통령 박물관은 국립미술관으로 변신했다.



광란의 무대가 된 성전

옛 대통령 관저를 벗어나 자동차로 약 1시간을 달려 느타라마 대학살 기념관 주차장에 도착했다. 과거 천주교 성당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세계유산에 등록된 역사기념관이다. 담장에는 ‘기억하다’라는 의미의 ‘Kwibuka 31’이란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2025년 31주년 대학살 추모사업의 일환이란다. 1994년 4월 민병대의 무차별 학살극이 벌어지자 투치족은 ‘신성한 교회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안전한 피난처일 것’이라고 믿으며 몰려들었다. 이는 큰 오산이었다. 신부와 수녀들이 나서서 학살을 만류했지만 제일 먼저 그들이 살해당했고, 성당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했다. 5000여 명의 투치족이 이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성당 내부에는 피비린내 나는 흙 묻은 옷가지가 수없이 쌓여 있고 정글도·쇠창·둔기 등이 전시돼 있다. 심지어 건물 벽에는 아직도 혈흔이 남아 있다.



느타라마 대학살 기념관 옆 식당에 남아 있는 수류탄 피격 흔적.


다정했던 이웃이 증오의 대상으로

성당 옆 추모의 벽에는 수천 명의 희생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다. 지하 납골당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머리뼈와 유골이 선반에 줄지어 보존돼 있다. 추모시설 옆 언덕에는 학교와 식당 건물이 있다. 대학살 이전에는 인근 마을주민들의 친교 공간이었다. 후투족과 투치족이 다 같이 주일미사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대학살의 광란이 시작되자 이웃은 증오의 대상으로 변했다. 투치족에 온정적인 후투족도 예외 없이 처단됐다. 식당 건물 흙벽면 중간중간에는 구멍이 뻥뻥 뚫려 있다. 여성과 아이들이 모인 이곳에 수류탄을 던져 넣은 흔적이다. 지하 시설과 창고에서는 여성들이 잔인한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됐다. 민병대는 쌓여 있는 시쳇더미에 최루 가스액까지 뿌렸다. 독한 최루액을 참지 못해 움직이는 생존자들은 정글도 세례 속에서 숨을 거뒀다.


기억에서 멀어지는 대학살의 역사

기념관 내에는 깔끔하게 단장된 대리석 묘역 한 곳이 있었다. 환하게 웃는 묘비 사진은 ‘우무라자’라는 여성이었다. 1994년 4월 14일, 이 여성은 남편과 함께 피신 중 민병대에 붙잡혀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남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는 아내 시신을 황급히 성당 부근에 가매장하고 탈출했다. 학살이 종식된 뒤 남편은 유해를 가족묘지로 이장하려 했다. 그러나 희생자들을 잊지 않도록 이 여성의 묘역을 기념관 내에 만들자는 요청이 쇄도했다. 그 결과 희생자의 상징으로 이 묘역이 조성됐다. 오늘날 이곳은 르완다인이 겪은 비극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대표적인 추모 공간이 됐다. 하지만 최근 인류 역사의 최대 수치로 남아 있는 이 학살기념관을 찾는 발길이 많지 않다. 이런 비극도 휘발성이 강한 역사의 특성으로 거의 잊혀 가는 듯했다.


필자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는 2010년 국내 최초로 군사학 박사학위를 충남대에서 취득했다. 세계 50여 개국을 직접 답사해 『세계의 전쟁유적지를 찾아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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