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K-47(2020)
독소전쟁 참혹한 현실 경험하고
숱한 실패 끝에 AK-47 완성
내전과 함께 세계 분쟁지로 확산
순수한 의도가 불러온 비극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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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콘스탄틴 부슬로프
출연: 유리 보리소프(미하일 칼라시니코프), 올가 레르만(카챠), 아르투르 스몰랴니노프(리우티 대위), 엘다르 칼리뮬린(자이체프), 발레리 바리노브(드티야로프 장군)
총구가 침묵할 때, 병사는 죽어갔다
“독일 병사는 손쉽게 연사를 퍼붓는데 우리 총은 진흙 속에서 굳어버렸다.” 전차병 칼라시니코프가 목격한 이 비참한 현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쟁의 포문과 함께 시작됐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0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이 소련 국경을 짓밟았다. 작전명 ‘바르바로사’. 히틀러는 자신만만했다. 130년 전 나폴레옹이 밟았던 참패의 절차를 똑같이 밟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전차와 전투기, 그리고 전격전의 압도적 속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히틀러는 치명적인 변수를 계산에 넣지 못했다. 끝없이 펼쳐진 소련의 광활한 대지, 뼈를 깎는 혹한, 그리고 목숨을 건 소련인들의 처절한 저항 의지였다.
독소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흘린 단일 전쟁이었다. 소련군 사망자만 87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면 무려 2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 세계대전 전체 사망자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셈이다.
포화 속에서 소련군을 괴롭힌 것은 치명적인 화력 열세와 무기의 부족한 신뢰성이었다. 독일군은 분대마다 MP40 기관단총과 연사력이 무시무시한 MG 기관총을 배치해 소련군을 쓸어 담았다. 반면 소련군은 당장 쥐어 줄 총조차 부족했고, 보급된 신형 무기들은 툭하면 탄잼(탄알 걸림)을 일으켰다. 1943년 독일군이 분당 500발을 쏟아붓는 세계 최초의 돌격소총 StG 44까지 전장에 끌고 나오자 전장은 살아있는 지옥으로 변했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이 시기 소련군이 속절없이 무너진 근본적 원인을 다른 곳에서 찾았다. 전쟁 직전인 1937~1938년, 스탈린의 광기 어린 대숙청으로 베테랑 장교단 3만5000명이 처형되거나 투옥됐다. 즉, 전쟁이 터졌을 때 지휘체계는 이미 뇌사 상태였다.
1941년 10월, 브랸스크전투에서 중상을 입은 전차병 칼라시니코프는 병원으로 이송됐다. 후송길에서 그는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신형 기관단총을 들고도 탄창이 뻑뻑해 총알 한 발 쏘지 못하고, 울부짖다 죽어가는 전우의 모습이었다. 칼라시니코프는 후일 회고록에서 그날의 충격이 “더 좋은 총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병원 침대에서 시작된 총기 설계
영화는 AK-47이 1949년 소련군의 제식소총으로 최종 채택되기까지 8년을 조명한다. 주인공 칼라시니코프는 스펙도, 백그라운드도, 줄도 없는 청년 병사다. 공학 교육은커녕 제대로 된 설계판 한 번 잡아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두 가지 무기가 있다. 기계를 보자마자 구조를 직감적으로 꿰뚫어 보는 천재적 감각, 최전방의 진흙과 영하 40도의 강추위 속에서 진짜 필요한 총이 무엇인지 몸으로 터득한 ‘현장의 경험’이다.
병원 침대에 누워 사경을 헤매면서도 그는 틈틈이 총기를 그려 나간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혀를 찬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부상병들에게 끊임없이 다가가 대화를 건넨다. 소총수, 기관총 사수, 보병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수집한다. 이것이 바로 칼라시니코프만의 독창적인 설계 방법론이다.
퇴원 후 철도기지에서 근무하면서도 그는 틈만 나면 설계를 다듬는다. 마침내 기관단총 시제품을 만들어 심사대에 올리지만 결과는 낙방이다. 두 번째 도전도, 세 번째 도전도 실패로 끝난다. 심사위원들은 그의 천재적인 아이디어에는 감탄하면서도 선뜻 기회를 주길 주저한다. 그러나 칼라시니코프는 꺾이지 않는다. 탈락할 때마다 결함을 분석하고 총을 다시 깎아낸다.
1947년 마침내 칼라시니코프의 설계안이 최종 테스트 라인에 들어선다. 시험은 책상 위 이론 평가가 아니다. 걸쭉한 진흙탕 속에 총을 처박았다가 꺼내 즉시 연사하기, 영하의 극한 환경에서 작동시키기, 먼지 구덩이에 던져둔 뒤 분해 없이 그대로 쏘기. 칼라시니코프의 총은 기적처럼 모든 가혹 테스트를 완벽하게 통과한다. ‘7.62㎜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 줄여서 AK-47. 그의 나이 서른도 되기 전의 일이다.
깊은 죄책감 시달린 노년의 칼라시니코프
하지만 영화는 총이 채택된 이후 펼쳐질 잔혹한 미래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냉전이 시작되자 총은 순식간에 전 세계 분쟁지역으로 퍼져나갔고, 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닭 한 마리 값에 거래되는 비극이 벌어졌다.
칼라시니코프 역시 노년에 이 사실 때문에 깊은 죄책감과 심리적 고통에 시달렸다. 2013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그는 러시아 정교회 대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으며 괴로워했다. “나는 오직 조국을 지키기 위해 총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총이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려 무고한 피를 흘리게 했다는 사실이 내 영혼을 짓누릅니다.”
“시에라리온은 10년 동안의 내전으로 약 5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200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시에라리온 내전에 전차나 전투기, 미사일 같은 대형 무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시에라리온이라는 국가는 AK에 의해 붕괴된 것이다.”
『역사를 바꾼 총 AK47』,
마쓰모토 진이치 지음, 민음인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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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다른 두 거장의 만남
AK-47 vs M16
1990년 미국 버지니아주의 한 사격장. 백발이 성성한 두 노인이 나란히 서서 서로의 총을 들었다. 한 명은 소련의 미하일 칼라시니코프, 다른 한 명은 미국의 유진 스토너였다. 바로 냉전을 지배한 두 전설적인 총, AK-47과 M16의 창조자들이었다. 냉전을 대표하던 두 거장이 마침내 한 자리에 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들고 시험 사격을 했고, 칼라시니코프는 특유의 손놀림으로 현장에서 AK-47을 순식간에 분해해 스토너에게 구조를 설명했다.
두 사람이 창조해 낸 무기는 닮은 듯하면서도 철학부터 완전히 달랐다. AK-47의 철학은 ‘극단적인 단순함’이었다. 부품 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부품 간 공차(간격)를 여유 있게 설계해 부품 사이에 모래나 진흙이 들어가도 작동하도록 만들었다. 명중률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어떤 환경에서도 반드시 발사된다’는 신뢰성이 최우선이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 병사조차 단 몇 분 만에 숙련자로 만들 수 있었다.
반면 M16은 ‘정밀함과 효율성’의 결정체였다. 항공기 기술자 출신이었던 유진 스토너는 총기를 하나의 정밀한 항공 부품처럼 접근했다. 최대한 가볍고 정밀하게 설계했다. 5.56㎜ 소구경 고속탄을 채택해 반동을 비약적으로 줄이고 명중률을 극대화해 병사 한 명이 더 많은 탄약을 휴대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세심한 관리가 필수적이었다. 베트남 정글의 덥고 습한 환경과 먼지는 초기 M16의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고 말았다.
냉전이 막을 내린 뒤 두 총기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소련이 동맹국에 무상으로 도면을 뿌리고 라이선스를 허용한 덕분에 AK-47은 가장 흔한 무기가 됐다. 현재 전 세계에 존재하는 AK-47과 그 파생형은 정식 생산분만 1억 정, 불법 복제품까지 더하면 2억 정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기록 이면에는 아프리카와 중동의 헐값 거래, 테러리스트와 소년병의 무기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웠다.
필자 김인기는 전자신문인터넷 미디어전략연구소장, 전자신문인터넷 온라인편집국장, 테크플러스 대표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영화 속 IT 교과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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