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기술 훔쳐 전쟁 치르는 러 정보기관
러 비밀조직 도쿄에 거점 마련
첨단 장비·부품 3국으로 반출
수출 제재 ‘세탁’ 거쳐 러 반입
합법 신분 방패 정보요원 활개
日 기술자·자위대 포섭도 활발
정보기관 설립·법 정비 시급해
일본서 부품 빼돌려 무기 만드는 러시아
지난달 12일 뉴욕타임스는 “일본이 러시아의 스파이 소굴이 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군사정보국(GRU)의 비밀조직이 도쿄의 러시아 국영항공사 아예로플로트 사무실을 거점으로 삼아 일본산 첨단 부품과 장비를 확보하고, 이를 제3국을 거쳐 러시아로 반입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크라이나와 전쟁 이후 서방의 수출통제로 반도체와 정밀기계 조달이 막히자 러시아 정보기관이 일본에서 기술 확보에 나섰다는 것. 일본의 첨단 산업 기반과 허술한 방첩체계가 결합된 결과라는 지적도 덧붙였다.
보도에 따르면 GRU 20국 소속의 비밀 스파이조직이 도쿄에서 외교관·사업가 등으로 활동하며 전쟁에 필요한 기술·부품·장비들을 빼돌렸다. 서방 정보 당국은 이 조직의 총책이 러시아 국영항공사 아예로플로트 직원으로 위장한 막심 필첸코프라는 것도 파악했다. 일본에서 구한 부품은 정상적 대러 수출이 아니라 스리랑카 등 제3국 업체와 운송경로를 거쳐 러시아로 보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에 따르면 90% 이상의 러시아 미사일과 드론에서 회로기판·통신기·반도체 등 일본 부품이 발견됐으며, 이미 여러 차례 외교서신과 증거사진을 일본에 전달했다고 한다. 이들 부품에는 파나소닉·도시바·NEC 등 대기업 제품도 포함됐다.
24명의 사상자를 낸 올 5월 키이우 민간인 공격에 사용된 러시아 Kh-101 순항미사일에서도 일본산 부품이 발견됐다. 일본 기업이 러시아군을 의도적으로 지원한 흔적은 없지만 민간용으로 수출된 제품이 유령회사와 중개상을 거치며 최종 사용자가 세탁됐을 가능성이 크다.
앞서 지난 1월에도 러시아 정보기관이 일본 기업의 내부자를 포섭해 기술을 빼낸 전형적인 산업스파이 사건이 드러났다. 군사용으로 전용이 가능한 공작기계 제조업체 직원이던 일본인이 2022년 11월과 2024년 12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 통상대표부 소속 러시아인에게 첨단 기술 관련 영업 비밀을 제공하고 금품을 받은 사건이다. 일본 경찰은 해당 러시아인을 러시아 해외정보기관인 SVR 요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황을 종합하면 러시아 해외정보기관인 SVR과 군사정보기관인 GRU가 총동원돼 일본의 첨단 기술을 훔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들은 단순히 경제적 목적으로 산업기술을 빼돌린 게 아니라 수출이 금지된 일본의 첨단 부품과 장비를 러시아로 반출, 무기 제조에 활용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다.
러시아 스파이 천국이 된 일본
국제 화물운송 통계에 따르면 일본은 러시아가 필요로 하는 민·군 이중용도(duel use technology) 기술의 최대 수출국이다. 그런데 이들 물품은 직접 러시아로 운송되는 게 아니다. 일본 민감기술의 최대 수입국은 베트남이고, 베트남은 러시아로 민감한 기술을 판매하는 최대 수출국이다. 베트남이 최종 목적지 세탁을 위한 경유지인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러시아 국영항공사 아예로플로트가 운항 중인 스리랑카와 우즈베키스탄도 경유지로 이용된다. 러시아 정보요원들은 일본에서 외교관, 통상대표부 직원, 국영기업 종사자 등 합법적인 신분을 방패로 삼는다. 포섭방법에서도 표적인물과 사적 관계를 형성한 뒤 정보를 빼내는 전통적인 방식이 기본이다. 앞서 소개한 사건에서 러시아 통상대표부 직원으로 위장한 SVR 요원은 일본 기술자를 포섭할 때 우크라이나인인 것처럼 접근해 길을 묻는 방식으로 첫 접촉을 시작한 뒤 식사와 현금 제공을 통해 관계를 발전시킨 것으로 파악됐다. 우연히 만난 것을 가장해 인연을 만드는 것도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전형적 수법이다.
GRU의 활동은 다른 나라 군 정보기관과 양상을 달리한다. GRU는 군사정보, 특수공작, 사이버작전에 강점이 있지만 군사 분야에 그치지 않고 다른 국가 해외정보기관 수준의 광범위한 정보활동을 각국에서 수행한다. 일본에서 GRU 요원이 적발된 것은 처음이 아니다. 2000년 9월에는 GRU 소속 주일 러시아대사관 무관이 방위청 방위연구소 소속 해상자위관을 포섭, 자위대 비밀문서를 입수한 사건이 적발됐다. 2015년 12월에도 전직 육상자위대 간부가 GRU 요원인 러시아대사관 무관에게 자위대 내부 교육자료를 전달한 혐의를 받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도시바기계의 대소련 공작기계 불법 수출사건도 있다. 소련은 1982년부터 1984년 사이 일본에서 대공산권 수출금지 품목이던 선박 프로펠러 정밀가공용 공작기계와 노르웨이산 수치제어장치를 몰래 수입해 갔다. 이 장비는 소련 잠수함 프로펠러의 가공 정밀도를 높여 소음을 줄이는 데 이용됐다. 당시엔 일본 기업의 수출통제 위반이 주요 이슈였지만, 소련 정보기관이 서방 기술을 체계적으로 탈취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제재 우회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이 이처럼 ‘스파이 천국’이 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로 제국주의를 지원하던 정보기관을 폐지한 뒤 정식 국가정보기관을 갖지 않는 전통을 이어 왔고 방첩 관련 법체계도 미흡했기 때문이다. 최근 국제정세가 급변하며 안보 위기감이 고조되자 일본에서 정보기관 설립 및 방첩 관계법 정비가 급속히 추진되는 것도 이에 대한 반성에 기반한다.
기업·방첩기관 긴밀협조 필요
현대 산업스파이는 단순히 경쟁기업 간 문제만이 아니다. 전문 스파이조직인 국가정보기관이 목표기술을 선정하고, 외교공관과 국영기업을 전진기지로 활용하며 현지 협력자·유령회사·물류업체·사이버조직을 연결하는 분업화된 생태계를 구축해 산업스파이로 나서고 있다. 모든 기술이 연계되는 현대사회에서 민간 분야의 첨단 기술은 미사일, 무인기, 통신장비의 부품으로 전환된다. 경제안보와 군사안보를 구분하던 전통적 경계는 이미 무너졌다. 반도체·원전·조선·2차전지·방산 분야 기술 경쟁력을 보유한 한국은 결코 안전지대가 아니다. 고도로 훈련된 프로 스파이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전장에서는 예전의 기업 내부 보안정책 정도로는 대응하기 어렵다. 그들은 처음부터 기밀문서를 달라고 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접촉과정에서 공개자료 설명, 업계 동향, 제품 개발 아이디어처럼 경계심이 낮은 정보부터 파악하고 식사·선물·사례금을 지급하며 관계의 수위를 높인다.
사이버 영역에서는 피싱메일, 악성코드, 계정 탈취와 서버 침투를 병행한다. 수동적 내부 단속을 의미하는 기업 보안 수준에서 나아가 방첩기관의 능동적 대응활동이 필요하다. 방첩기관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기법과 접근 징후를 기업·대학에 구체적으로 교육하고, 수상한 접촉을 신고할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핵심 기술인력의 퇴직 관리, 공동연구 상대와 투자금의 실소유주 확인, 최종 사용자 검증, 제3국 재수출 추적도 강화해야 한다. 방첩기관은 기업에 일방적으로 정보를 요구만 할 것이 아니라 기업이 활용할 수 있는 위협정보를 신속하게 공유해야 한다.
국가정보기관이 산업스파이전에 나서는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다. 기술은 기업의 자산인 동시에 국가의 생존수단이어서다. 우리의 연구실과 생산현장, 해외 법인에서 이미 시작된 현실적 위협이다. 국가가 직접 기술을 훔치는 시대에 맞는 정교한 산업보안과 경제방첩체계를 갖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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