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란민의 ‘비빌 언덕’…역사는 철거되지 않는다

입력 2026. 07. 30   16:35
업데이트 2026. 07. 3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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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한남동 언덕, 기억해야 할 서울의 공동체 역사

조선시대 기우제 지내던 신성한 곳
6·25전쟁 이후 대규모 판자촌으로
마을 꼭대기엔 교회와 이슬람 사원
‘도깨비시장’ 생겨나며 활기 띠기도
재개발로 탈바꿈해도 기억은 남겨야

 

‘한남 3구역’이란 이름으로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서울 한남동 언덕 전경. 필자 제공
‘한남 3구역’이란 이름으로 재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서울 한남동 언덕 전경. 필자 제공


이태원 소방서 앞 계단을 오르면서 구보는 초입의 클럽이 건재함을 본다. 미군들이 레코드판을 틀며 맥주를 즐기던 곳이었다. 스탠드바에 앉아 머스타드를 곁들인 데친 소시지와 함께 생맥주를 마시는 맛이 좋았다. 이곳을 찾을 때마다 언덕 위 사원의 푸른 첨탑을 마주하며 성(聖)과 속(俗)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2026년 7월 구보는 한남 3구역 재개발이 진행 중인 이곳을 찾아 옛 기억을 더듬으며 산보에 나섰다. 기억해야 할 서울의 마을 형성사가 담겨 있는 곳이어서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두고 싶었다.

이태원 쪽은 아직 예전의 풍경이 남아 있다. 우사단로 언덕을 오르며 구보는 낡은 건물들과 좁은 골목에 눈길을 준다. 철거를 면한 곳이었다. 말레이시아 가정식 식당에 히잡을 쓴 여인 서너 명이 앉아 식사하고 있다. 꼭대기의 이슬람 중앙성원에 닿자 한남동 쪽 비탈길이 한눈에 들어온다. 8000여 가구가 이발기로 밀어버린 듯 사라지고 황토만이 남았다. 이 주거 단지는 곧 전혀 다른 규모의 밀도와 형태로 대체될 예정이다.

도로명 ‘우사단로’는 조선 태종 때 기우제를 지내던 제단 우사단(雩祀壇)을 이곳에 두었던(『국조보감』) 데서 유래한다. 국왕들이 몸소 찾아와 비를 간청했을 만큼 남산 자락의 신성한 장소였다. 신성함이 이슬람 성전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모스크가 들어서면서 이곳은 한국 내 이슬람인들 거주 지역이 됐다. 중동 국가를 중심으로 동남아시아, 터키, 중앙아시아, 아프리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슬람 율법이 허락하는 음식인 ‘할랄(Halal)’을 취급하는 슈퍼마켓과 식당이 들어섰다.

철거가 완료된 한남동 쪽 언덕에 거주하던 이슬람인들은 집세 싼 곳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중앙성원은 “접근성이 떨어져 하루 다섯 차례 행해지는 예식의 참석자 수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전한다. 그들이 고급 주거 단지로 바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지는 못할 거라는 데 생각이 미치자 예전 이곳의 주거 풍경이 뇌리에 소환됐다.

 

 

용산구 우사단로의 모습.
용산구 우사단로의 모습.


이 비탈에는 남산에서 한강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등고선대로 집이 얹히면서 골목이 계단식으로 층을 이뤘고, 초기 가옥은 판자벽에 ‘루핑’이나 검은 비닐을 덮은 ‘하꼬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기와지붕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피란민과 이주민들이 정착해 이룬 터에 여러 구성원이 합류했다. 1970년대에는 서울에 집을 장만하려 한 지방 사람들이, 1980년대는 중동 건설 노동으로 돈을 번 노무자들이 이곳에 주택을 장만하곤 했다. 집값이 상대적으로 쌌던 데다 남산과 한강이라는 환경이 유인 요소로 작용했다. 현재 70대에 이른 당시 아이들은 1960년대 한강변 풍경이 그러했듯이 한남천에서 물놀이하며 소년기를 보냈다.

조선시대의 한남동은 한양도성 밖 한강진(漢江鎭) 나루터에 지나지 않았다. 1395년 이후 이 일대는 경기 양주군에 속했다가 1424년에야 성저 오리(城底五里)로 일컬어지며 한성부의 경계 내 관할이 됐다. 풍광이 좋아 제천정과 세심정 등 귀족들의 정자가 들어서기도 했으나 1936년 경성부에 편입되기 전까지 수도 외곽에 지나지 않았고, 공동묘지가 자리했을 뿐이었다(『한남동』).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의 주거 단지 조성을 위한 ‘대경성도시계획’이 세워지고서야 묘지를 허물고 주거지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곳에 변화를 불러온 계기는 6·25전쟁이었다. 전쟁은 남한 전역에 대규모 인구 이동을 불러왔다. 1952년 말 남한의 피란민은 186만 명에 달했고, 이들 대부분은 생활 기반을 잃은 채 도시로 몰려들어 국유지와 공유지를 무단으로 점유하며 대규모 판자촌을 형성했다. 청계천과 후암동, 노량진과 더불어 한남동 역시 이런 판자촌이 들어선 대표적 지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부와 서울시는 이렇다 할 구제책을 내놓기보다 단속과 철거로 일관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은 개발이 더딘 언덕배기, 경사가 가파르고 땅값이 낮아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곳들을 찾아 하나둘 판잣집을 세웠다. 전쟁으로 몸이 상한 상이군인과 가까운 용산의 옛 일본군 기지를 접수한 미군 부대 주변에서 생계를 구하던 이들도 적지 않았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정된 일자리도, 돌아갈 고향도 없던 이들에게 이 언덕은 마지막으로 몸을 누일 수 있는 빈터였다. 이태원과 잇닿은 이 자리는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물자와 그것을 둘러싼 크고 작은 거래로 다른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60년대 접어들며 언덕 끝자락, 지금의 우사단로10길 어름에 ‘도깨비시장’이 생겨났다. 지금은 철거돼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시장은 ‘남대문 도깨비시장’처럼 활기를 띠며 이곳 주민들의 살림을 지탱했다(『한남동』).

 

한남동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슬람 중앙성전.
한남동 언덕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이슬람 중앙성전.



교회가 마을의 역사와 함께했다. 판자촌 사람들의 허전한 마음을 붙들 존재가 필요했던 연유였다. 1957년 15명의 주민이 모여 예배를 드린 것이 한광교회의 시작이었다(한광교회 연혁). 피란과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 언덕 가장 높은 자리에 세워진 이 교회는 70년 동안 언덕 공동체의 사랑방 구실을 이어왔다. 한남대교와 강변북로에서도 한눈에 들어온다고 해서 ‘꼭대기 교회’라는 별칭을 얻었다.

모스크는 1970년대에 들어섰다. 두 차례의 석유파동을 거치며 중동 국가들과 우호를 다지려 한 외교적 대응의 산물이었다. 이곳을 선택한 데는 고려 시대부터 이태원에 아랍 상인들이 거주한 역사적 배경이 작용했다. 부지는 정부가 제공했고, 건립 비용은 신도들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이슬람 각국을 돌며 모금해 충당했다. 1974년 10월 첫 삽을 떠서 1976년 5월 21일 완공해 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쿠웨이트 등 17개국의 대표단이 참석한 가운데 최초의 이슬람 사원 개원식을 열었다(서울중앙성원).

한남동 도선장에서 강 건너 신사동까지는 나룻배가 오가며 사람을 실어 나르다 1969년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놓여 강남권과 이어지면서 입지가 크게 높아졌다. 현재 이곳 아파트 시세는 수십억 원에 달한다. 한남동 언덕이 종말을 맞게 된 배경이다.

한남동 언덕은 피란민과 상이군인이 세운 판잣집 위에 도깨비시장이 서고 그 위에 다시 두 개의 신앙이 얹히면서 공간의 특성을 구현해 온 시간의 단면을 안고 있다. ‘한남동 시대’를 맞아 재개발이 옛 골목을 지워가는 지금도, 우사단로를 오르내리는 걸음들은 여전히 그 겹겹의 시간 위를 걷고 있다. 구보는 언덕길을 내려오며 이 공간이 잊혀서는 안 될 기념비적 공동체 역사를 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여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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