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가장한 시대, 명화가 비춘 욕망의 민낯

입력 2026. 07. 30   16:23
업데이트 2026. 07. 3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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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곁에, 예술
영화 속 미술 - 영화 ‘순수의 시대’와 19세기 그림

미학적 스케일 압도적인 마틴 스코세이지의 명작
19세기 미국·유럽 명화 200여 점, 작품 곳곳에 배치
크노프 ‘스핑크스의 애무’로 금기된 사랑 예고하는 등
소품 넘어 탐욕과 위선 드러내는 서사 장치로 활용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의 애무’, 1896년, 50.5×151㎝,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페르낭 크노프, ‘스핑크스의 애무’, 1896년, 50.5×151㎝, 캔버스에 유채. 벨기에 왕립미술관 소장

 

영화 ‘순수의 시대’의 한 장면. 조반니 파토리, ‘야외에 앉아 있는 여인’, 1866년, 12.7×28㎝, 패널에 유채. 브레라미술관 소장
영화 ‘순수의 시대’의 한 장면. 조반니 파토리, ‘야외에 앉아 있는 여인’, 1866년, 12.7×28㎝, 패널에 유채. 브레라미술관 소장



할리우드의 거장 감독 마틴 스코세이지는 주로 뉴욕 뒷골목의 삶을 그려왔지만,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특별한 작품이 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린 멜로드라마 ‘순수의 시대’다. 187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두 남녀의 금지된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그 이면에는 위선으로 가득 찬 상류층 사회를 폭로하고 그 속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심리를 담고 있다. 스타일의 대가답게 스코세이지는 수많은 미술 작품을 등장시키고 회화의 구도를 차용하며 자신만의 미학과 서사를 완성했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결혼을 앞둔 뉴욕 명문가의 자제 아처와 메이 앞에 메이의 사촌언니 엘렌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엘렌은 유럽에서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겪은 후 뉴욕으로 돌아왔다. ‘질병보다 체면이 중요했던’ 뉴욕 사교계에서 이혼을 앞둔 엘렌은 온갖 구설에 오르지만, 정작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엘렌에게는 사교계에서 엄격한 관습을 따르며 인정받는 것보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럼에도 가족들은 이혼을 막기 위해 변호사인 아처에게 엘렌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하고,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19세기 말 뉴욕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성장하며 미국 최대의 도시가 되고 있었다. 당시 뉴욕의 상류층은 막대한 부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짧은 역사와 전통에 대한 열등감 때문에 유럽 귀족 사회를 흉내 내며 체면과 격식에 더욱 집착했다. 영화 ‘순수의 시대’는 이러한 탐욕의 시대를 눈부신 볼거리로 재현한다. 사치스러운 드레스와 턱시도는 물론 샹들리에와 고급 가구, 연회 때마다 테이블을 가득 채우는 음식과 은식기까지 화면을 빈틈없이 메운다. ‘시각적 과잉’이라는 평가가 나올 만큼 이 영화는 연출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등장인물의 집과 연회장 벽을 가득 메운 그림을 찾는 것은 영화를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미술 작품을 분석한 논문이 있을 정도로 작품 선정에도 공을 들였다. 카메라가 스쳐 지나가는 그림이 있는가 하면 주인공 아처가 오랫동안 응시하는 작품도 있다. 약 200점에 이르는 그림들은 단순히 부를 과시하는 소품이 아니라 인물의 취향과 사회적 지위, 나아가 그들의 심리와 처지를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한다. 예를 들어 뉴욕 법조계의 권력층으로 등장하는 루이든의 집에는 귀족 가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초상화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반면 막대한 재산을 가졌지만 출신이 불분명하고 천박하다는 평판을 받는 보퍼트의 집에는 19세기 후반 지나치게 관능적이라는 이유로 졸부들의 취향으로 폄하된 윌리엄 아돌프 부게로의 ‘봄의 귀환’이 걸려 있어 그의 사회적 위치를 대변한다.

엘렌의 집에는 엘렌의 취향과 성격뿐만 아니라 훗날 아처와 맺게 될 관계를 암시하는 그림들이 곳곳에 걸려 있다. 첫 번째 작품은 이탈리아 화가 조반니 파토리의 ‘야외에 앉아 있는 여인’(1866)이다. 가로로 긴 작은 화면에는 양산을 쓴 한 여인이 들판인지 공터인지 모를 공간에 앉아 있다. 영화에서 아처는 처음 엘렌의 집을 찾았을 때 이 그림을 유심히 바라본다. 흥미로운 점은 여인의 얼굴에 눈, 코, 입이 전혀 묘사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얼굴은 마치 붓질의 흔적처럼 하나의 색면으로 처리돼 있으며 양산과 드레스, 산과 호수 역시 단순한 색면으로 표현됐다. 영화의 배경인 1870년대를 고려하면 이러한 회화 방식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유럽의 현대적 감각을 담은 이 그림은 엘렌의 세련되고 독립적인 성향과 잘 어울린다. 한편 얼굴 없는 여인은 아처에게 뉴욕 사교계의 여성들과 다른, 수수께끼 같은 매력을 지닌 엘렌을 은유하는 듯하다.

엘렌과 아처가 서로 사랑에 빠진 뒤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벽난로 위에 페르낭 크노프의 ‘스핑크스의 애무’(1896)가 걸려 있다. 작품 속에는 한 남성과 스핑크스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그런데 이 스핑크스는 여성의 머리와 표범의 몸을 지닌 기이한 존재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핑크스는 지나가는 남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고 맞히지 못하면 목숨을 앗아간다. 이러한 신화적 설정에 더해 화가는 스핑크스를 관능적인 여성으로 묘사함으로써 치명적인 유혹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이는 결국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아처와 엘렌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이 영화에는 19세기 미국과 유럽의 다양한 사조와 장르를 아우르는 작품들이 등장한다. 물론 영화를 위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작품을 실제로 모은 것은 아니다. 화면에 보이는 그림은 모두 명화 복제 전문 업체에 의뢰해 제작한 모조품이다. 이 영화에 어울리는 작품을 찾기 위해 시각 자문가는 2년 동안 뉴욕의 미술품 경매장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후 스코세이지 감독과 미술감독은 수백 점의 후보 가운데 약 200점을 최종 선정해 영화에 배치했다. 말없이 벽에 걸린 그림들은 어쩌면 1870년대 뉴욕 상류층 사회의 탐욕과 위선을 조용하게 폭로하는 또 다른 화자인지도 모른다.


필자 김유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배움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필자 김유미는 홍익대학교에서 서양미술사를 전공하고 미술관에서 교육을 연구하는 일을 맡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서 배움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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