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도시 이야기
일본 삿포로와 영국 에든버러 下
북해의 거친 바람·변덕스러운 날씨, 위스키 빚어내기 좋은 땅 ‘에든버러’
치료용 약품에서 밀주→고결한 술→밀주…메리 여왕 시대 세계로 확장
12년·18년·25년 시간이 익어 어느새 스코틀랜드 자존심이자 문화로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의 거친 바람과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서 탄생한 술이다. 한때 서민들이 몰래 빚어 마시던 밀주였던 위스키를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술로 끌어올린 인물은 메리 여왕이다. 여왕의 만찬주였던 스카치위스키는 포도 증류주의 위기 속에 마침내 세계적인 술로 자리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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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스러운 날씨가 만든 술
버스를 타고 영국 런던을 출발한 지 10시간 만에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분명 같은 영국인데, 우리에게 익숙한 그 영어가 아니었다. 억양은 강했고 발음은 거칠었다. 날씨도 달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은 허공에서 이리저리 흩날렸다. 에든버러에서는 도무지 단정한 머리 모양을 유지할 수 없었다.
스카치위스키의 탄생은 날씨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스카치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를 가리키는 말이다. 법적 기준에 따라 스코틀랜드 증류소에서 제조하고 오크통에서 최소 3년 이상 숙성해야 한다. 스코틀랜드의 기후와 전통, 엄격한 규정 속에서 빚어지는 술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싱글몰트 역시 이 범주에 속한다.
스코틀랜드는 위스키를 빚어 내기에 좋은 땅이다. 북위 56도의 에든버러는 거친 북해의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는 차갑고도 냉랭한 도시다. 그렇다고 겨울이 무작정 혹독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기류가 도시를 감싸며 한겨울에도 평균 최고기온이 6도 안팎에 머문다. 에든버러 사람들이 “하루에 사계절을 다 겪는다”고 말하는 것도 그래서다. 우리가 한 달을 머문 8월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반소매부터 카디건, 재킷, 머플러까지 하루에 모두 꺼내야 할 만큼 날씨는 쉽게 변덕을 부렸다.
이처럼 연중 비교적 온화하면서도 하루 단위로 기온과 습도가 오르내리는 환경은 오크통에 끊임없는 자극을 준다. 오크통은 그 변화에 맞춰 미세하게 호흡하고, 그 과정에서 잡미를 만드는 유기화합물이 빠져나가며 원액의 풍미가 응축된다. 결국 스코틀랜드의 기후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스카치위스키의 맛을 깊고 복합적으로 만드는 보이지 않는 장치다.
에든버러는 연중 하늘을 뒤덮는 궂은비와 낮게 깔리는 해무, 한겨울 오후 4시면 이미 저물어 버리는 짧은 해를 가진 도시다. 이런 조건은 위스키가 오크통 속에서 서서히 익어 가도록 돕는다. 스카치위스키 숙성 과정에서 불가피한 원액 손실도 상대적으로 줄여 준다. 또한 겨울과 여름의 기온 차가 크지 않은 완만한 기후는 오크통의 타닌 성분이 천천히 우러나게 한다. 그 덕분에 위스키 원액의 섬세한 과일 향과 몰트 향, 오크통에서 비롯된 바닐라와 스파이스 향이 오래도록 균형을 이룬다. 이런 환경은 12년, 18년, 나아가 25년 이상 장기숙성을 가능하게 하는 든든한 바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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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주에서 세계적인 브랜드로
스카치위스키의 역사는 중세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작은 약용으로 쓰이던 알코올 증류액이었다. 상처를 치료하고 마취에 활용하던 약품이었던 만큼 16세기 초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는 이발사와 외과의사 길드에 제조·판매 권한을 독점 부여했다. 당시엔 이발사도 외과수술을 맡을 수 있었다. 일반인이 위스키를 빚어 마시려면 하일랜드 산속으로 숨어들 수밖에 없었다.
밀주에 가까웠던 스카치위스키가 오늘날처럼 품격 있는 술로 자리 잡기까지는 왕실의 권위와 무게가 중요했다. 잉글랜드 왕 조지 4세가 하일랜드 위스키를 권유받아 마신 게 왕실과 스카치위스키의 첫 공식적 만남이었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이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를 방문해 왕실 문장을 수여하면서 밀주 취급을 받던 술은 ‘왕이 마시는 고결한 술’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된다.
하지만 스카치위스키는 18세기 들어 다시 밀주의 그림자를 뒤집어쓴다. 잉글랜드 정부가 그들의 종속하에 있었던 스코틀랜드 주류 산업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한 것. 사람들은 이미 익숙해진 스카치위스키를 쉽게 포기하지 못했다. 그 수요는 오히려 산속 깊은 곳의 은밀한 주조 과정을 키워 냈다. 결국 위스키는 억압 속에서 더 널리 퍼져 나갔다. 세금은 산업을 죽이기보다 숨어서 번성하는 밀주문화를 낳았다. 그러다가 19세기 초 다시 주류 세법이 개정되면서 비로소 합법적인 주조의 길이 열렸다. 스카치위스키는 그제야 본격적인 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 흐름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식료품상 존 워커다. 1820년 부친이 남긴 자금으로 식료품과 와인, 증류주를 함께 파는 가게를 연 존 워커는 손님의 취향에 맞춰 여러 위스키를 따로 조합해 팔았다. 그 과정에서 거칠고 불균일하던 초기 위스키의 품질이 안정됐다.
존 워커가 술의 품질을 높였다면 스카치위스키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운 것은 아들 알렉산더 워커였다. 알렉산더 워커는 1865년 부드럽고 균일한 상업용 블렌드인 ‘올드 하일랜드 위스키’를 만들고 1867년 이를 정식 등록했다. 이 제품이 훗날 ‘조니워커’라는 이름으로 세계 시장에 퍼지게 된다.
스카치위스키의 운명을 가른 또 하나의 계기는 뜻밖에도 프랑스에서 시작됐다. 1880년대 포도뿌리혹벌레가 프랑스 전역의 포도밭을 휩쓸면서 코냑과 브랜디 산업이 사실상 붕괴했다. 빈자리를 가장 빠르게 메운 것은 그동안 브랜디에 밀려 있던 맥아 증류주, 즉 스카치위스키였다. 조니워커를 비롯해 듀어스, 뷰캐넌, 화이트호스 같은 브랜드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장을 장악해 갔다. 프랑스의 포도밭이 회복됐을 때는 이미 스카치위스키가 브랜디의 자리를 대신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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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이름, 메리 여왕
스코틀랜드는 메리 여왕을 빼놓곤 설명할 수 없다. 한 시대를 흔든 그녀의 흔적은 에든버러 도심 한가운데 우뚝 솟은 캐슬록에 담겨 있다. 3억5000만 년 전 화산 활동으로 형성된 이 바위 정상에는 에든버러 성이 시내를 굽어보듯 서 있다. ‘7개 언덕 위의 도시’로 불리는 에든버러는 중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이처럼 험준한 바위 위에 성을 세웠다. 에든버러 여행은 바로 이 성에서 시작해 홀리루드 궁전까지 약 1.6㎞의 왕의 길 ‘로열마일’을 따라 이어진다.
1542년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 스튜어트는 어린 시절을 프랑스 궁정에서 보내고 프랑스 왕세자와 결혼해 왕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남편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고국으로 돌아온 그녀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3번의 결혼과 잇따른 남편의 사망이라는 비극, 사촌이자 평생의 라이벌이었던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와의 권력 다툼 끝에 메리는 1567년 강제로 폐위당했다. 이후 19년간 유폐된 채 지내다가 1587년 처형되며 생을 마감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메리 여왕을 죽인 엘리자베스 1세는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다. 잉글랜드의 왕위는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이어받아 영국 왕실의 ‘제임스 1세’가 됐다. 이를 ‘왕관의 연합’이라고 부른다. 메리는 생전엔 모든 것을 잃었지만 죽은 뒤 결국 승리한 셈이다. 두 나라는 한 사람의 군주를 공유했지만 정부와 의회는 여전히 따로였다. 잉글랜드는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는 에든버러에서 각자 통치되는 체제가 한 세기 가까이 이어졌다.
이 어색한 동거는 1707년 로열마일의 옛 의사당에서 승인된 연합법으로 마침내 끝을 맺었다. 두 나라의 의회는 하나로 합쳐져 웨스트민스터에 그레이트브리튼 의회가 세워졌고,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 의회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 합의가 스코틀랜드 민심까지 얻은 것은 아니었다. 독립주권을 잃고 잉글랜드 중심의 대영제국에 병합된 상실감은 이후 스코틀랜드인에게 오래도록 정체성의 결핍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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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주권과 살아남은 술
스코틀랜드인에게 메리 여왕은 단순한 역사 속 인물이 아니다. 그녀는 나라가 잃어버린 주권의 기억이자 쉽게 지워지지 않는 정체성의 상징이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여왕의 이름은 시간이 흘러도 스코틀랜드인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그 감정의 결은 스카치위스키를 바라보는 시선과도 묘하게 겹친다. 스카치위스키는 메리 여왕의 시대와 맞물려 형성된 술이다. 스코틀랜드의 땅이 품은 냉랭함과 습도, 거친 바람과 깊은 산지의 공기가 함께 빚어냈다. 더불어 왕실의 승인과 산업화, 브랜디의 공백 속에 세계 시장으로의 확장을 거치며 차츰 위상을 높여 갔다.
스코틀랜드인에게 스카치위스키는 단순히 성공한 상품으로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억눌린 역사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은 지역의 자존심이고, 자신들의 땅에서 비롯된 문화의 증거다. 한때 숨겨 마시던 술이 이제는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는 사실 자체가 이들의 기억을 더욱 특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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