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사람, 그리고 세계문화
페루 마추픽추, 잉카 최후의 비밀 도시
15C 황제에게만 의존한 잉카 제국
스페인 정복자의 기습 공격에 붕괴
1911년 이야기 따라간 美 역사학자
석조 건축물 늘어선 산등성이 발견
건설 목적은 황실 별궁설 가장 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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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우리나라에서 남미 여행이 인기를 누렸다. 이때 사람들은 남미에서 방문하고 싶은 곳으로 자연경관은 장대한 이구아수 폭포를, 역사 유적지로는 ‘잃어버린 공중 도시’ 마추픽추를 꼽았다. 특히 후자는 긴 세월 숨겨진 도시였다는 신비감이 더해지며 여행 애호가들의 필수 방문지로 떠올랐다. 그런데 워낙 오지인지라 접근이 쉽지 않아 어지간한 의욕만으로는 실행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마추픽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악 유적의 건축적 정교함만이 아니라 잉카제국의 흥망과 스페인의 정복전쟁, 20세기 고고학 탐사의 역사까지 알아야 한다. 과연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198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루 안데스산맥 속 마추픽추로 떠나 보자.
마추픽추는 어떻게 시작됐을까? 15세기 중엽 남아메리카 안데스산맥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잉카제국이 그 탄생의 주인공이었다. 오늘날 페루 쿠스코를 수도로 삼았던 잉카제국은 북쪽으로 현재 에콰도르 남부부터 남쪽 칠레 중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마추픽추는 잉카제국의 9대 황제 파차쿠티 통치기인 1450년경 건설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잉카를 지역 부족국가에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시킨 정복 군주였다. 파차쿠티의 군대가 안데스 각지로 출동해 수많은 부족과 왕국을 복속시키면서 잉카제국은 본격적인 팽창의 시대를 열었다.
그렇다면 파차쿠티는 왜 마추픽추를 건설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난무한다. 가장 유력한 견해는 황실 별궁설이다. 파차쿠티와 황족들이 휴양지 겸 종교의식 거행을 위한 장소로 조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군사적 측면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마추픽추는 해발 2430m의 산악 능선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게다가 주변은 수백m 깊이의 절벽으로 에워싸여 있다. 아래로는 우루밤바강이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흐른다. 끊임없이 반란에 시달리던 황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여건을 갖춘 피난처가 없었다. 이런 맥락에서 마추픽추는 종교 중심지이자 황실 거처이며 동시에 방어 요새라는 복합적 기능을 감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1520년대 말 잉카제국은 심각한 내전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황제의 사망으로 두 아들 간 제위 쟁탈전이 벌어진 탓에 제국은 심각한 혼란 상태에 처해 있었다. 바로 이 시기에 나타난 인물이 스페인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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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로는 1470년경 스페인 서부 트루히요에서 하급 귀족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피사로는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해 평생 글을 읽고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알려져 있다. 불리한 출신 배경은 오히려 그를 모험가의 길로 이끌었다. 1502년경 새로운 기회를 찾아 신대륙에 도착한 피사로는 다양한 정복 사업에 적극 가담해 명성과 야망을 키웠다.
1524년부터 남미 서해안 일대 탐험에 착수해 실패의 경험을 쌓아온 피사로는 그 과정에서 잉카제국의 존재를 확신하게 됐다. 스페인 왕실로부터 정복 사업 권한을 획득한 그는 1532년 불과 168명의 병력과 수십 마리의 말을 이끌고 안데스고원으로 진입했다. 당시 잉카제국은 1000만 명을 웃도는 인구를 가진 거대 국가로서 10만 명 이상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표면상 승패는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불과 몇 년 후 잉카제국은 무너졌고,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서부 전체를 차지했다. 수적으로는 잉카 군대에 비해 압도적으로 열세였으나 앞선 무기체계와 원주민 동맹세력을 활용해 잉카제국의 중심부를 공격한 것이 주효했다.
결정적 계기는 1532년 벌어진 이른바 ‘카하마르카 사건’이었다. 카하마르카 광장을 찾은 황제 아타우알파는 수만 명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있었음에도 피사로 원정대의 기습 공격으로 포로가 됐다. 잉카 국가체제는 황제 개인에게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었기에 최고 통치자의 포획은 곧 국가 전체의 마비를 의미했다. 1533년 스페인군이 수도 쿠스코를 점령하면서 잉카제국은 사실상 무너졌다. 물론 깊숙한 안데스 산악지대에서 일부 잉카인에 의한 저항이 이어졌지만 결국 1572년 독립된 잉카제국은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1821년 페루가 독립국으로 재탄생할 때까지 긴 세월 동안 잉카제국은 모습을 감췄다. 그런데 과연 진짜 그랬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잉카제국 ‘비밀의 도시’ 마추픽추가 드러난다.
스페인 통치 당시 베일에 싸여 있던 이곳은 20세기 초반 예일대학교 역사학자이자 탐험가인 하이럼 빙엄(1875~1956)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11년 여름 빙엄은 예일대의 지원으로 잃어버린 잉카 도시를 찾기 위해 페루 안데스 산악지대를 탐사하고 있었다. 현지 농민의 안내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던 빙엄은 숲에 가려진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 늘어선 산등성이를 발견했다. 긴 세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져 버린 잉카제국의 옛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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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부터 대규모 조사와 발굴 작업이 이뤄졌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수많은 건물과 계단, 광장, 수로 시설이 우거진 숲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늘날 마추픽추는 13㎢ 규모의 유적군으로 구성돼 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등성이 위에 건설된 도시는 길이 약 530m, 최대 폭 약 200m로 전체 면적은 5만~8만㎡ 정도로 추산된다. 현재까지 확인된 건물만 해도 총 200동이 넘는데 이외에도 훨씬 많은 구조물이 존재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도시의 산비탈을 따라 조성된 수백 개의 계단식 경작지다.
마추픽추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물은 종교 구역 내 반원형 석조 건물로, 잉카의 태양신 인티(Inti)를 숭배한 신전이다. 창문 방향이 동지 및 하지 시에 태양 위치와 연관돼 있어 천문관측 기능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핵심 유적은 인티와타나 석주(石柱)다. ‘태양을 묶는 기둥’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구조물은 천문관측과 종교의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교한 각도와 배치 상태를 통해 당시 잉카인들의 높은 천문학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왕실 구역에는 황제와 귀족들의 거주지로 추정되는 뛰어난 석조 기술을 자랑하는 건물들이 있다. 잉카인은 철제 공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수 톤에 달하는 화강암 블록을 정밀하게 다듬었다. 돌과 돌 사이에는 칼날조차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빈틈이 없다.
이러한 탁월함에도 전쟁은 잉카제국을 무너뜨렸다. 위세를 떨치던 황제들은 사라졌고, 국가도 멸망했다. 역설적으로 제국의 몰락과 함께 버려진 산악도시 마추픽추는 수백 년에 걸친 스페인 정복자들의 감시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마추픽추는 단순한 고대도시 유적이 아니다. 한때 남아메리카를 지배했던 잉카제국의 정치력과 기술력, 종교관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다. 특히 스페인의 정복과 지배라는 세계사적 격변 속에서 사라진 문명이 남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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