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Ⅱ
아프리카-르완다 ②
아류샤 평화협정 파기로 시작된 대학살…동족상잔 비극으로
RPF 600명, 4일간 국회 사수…시민 구하며 해방 교두보 마련
‘해방의 날’ 국경일로…1268명 지킨 호텔은 영화 배경 되기도
르완다 국회의사당은 키갈리 중심부의 산 능선에 있다. 1993년 12월 28일 이곳에 아루샤(Arusha) 평화협정 이행을 위해 투치족 정치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의 신변 보호를 위해 투치족 르완다 애국전선(RPF) 3대대 장병 600명도 국회에 주둔했다. 1994년 4월 르완다 전역에서 대학살이 시작됐다. 경호 인력은 수만 명 후투족 민병대에 포위됐다. 그러나 방어부대는 나흘 동안 사투를 벌이며 진지를 사수했다. 이후 국회의사당에는 반학살 박물관이 세워졌다.
르완다 난민 역사와 깨어진 평화협정
1961년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면서 다수 종족인 후투족이 정권을 잡았다. 정치보복을 두려워한 투치족 수십만 명은 우간다, 탄자니아, 부룬디, 콩고 등으로 탈출했다. 난민들은 수십 년 동안 집단수용소에서 생활하며 정권 탈환 의지를 키웠다. 난민 2세들은 1980년대 후반 ‘르완다 애국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요구하며 1990년 르완다를 기습 공격했다. 1991년 3월에는 양측이 첫 번째 적대행위 중지협정을 체결했다. 드디어 1993년 8월 4일 아루샤 평화협정으로 광범위한 과도정부와 의회 구성에 후투족과 투치족은 약속했다. 그러나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 대통령의 항공기 격추 사건을 계기로 평화협정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대학살에 얽힌 기막힌 가족사
국회의사당 정문에서 검문을 거친 뒤 한참 숲길을 따라 걸었다. 이윽고 국회 본관 앞에 도착했다. 건물 벽에는 총알에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처절했던 내전의 상흔을 절대로 잊지 말자는 르완다인들의 결의처럼 느껴졌다. 안내인 루타간다는 대학살에 얽힌 기막힌 일화를 들려줬다.
“모니카는 후투족 여성이지만 집안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진 투치족 남자와 결혼했다. 평화롭던 일상은 대학살이 시작되자마자 잔혹한 악몽으로 변했다. 투치족을 사냥하던 민병대 속에는 놀랍게도 모니카의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남편과 6명의 자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아버지는 울부짖는 모니카를 향해 ‘네가 뱀(투치족)과 결혼해 가문을 더럽혔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소리쳤다. 가족을 모두 잃은 모니카는 겨우 탈출해 탄자니아 수용소로 피신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투치족을 학살하고 도망쳐 온 자신의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모니카는 아버지와 같은 하늘 아래 난민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적진 속에서 버틴 4일간의 사투
국회 박물관에는 제3대대의 국회 사수 과정이 날짜별로 상세하게 설명돼 있다. 1994년 4월 6일 밤 르완다 대학살극은 시작됐다. 바로 이 시간 우박 같은 포탄이 국회에 포진한 르완다 RPF 장병 600명의 머리 위에 쏟아졌다. 1만여 명의 정부군과 수만 명의 민병대가 의사당을 포위했다. 총포탄 세례도 건물 지하실과 깊은 참호 속에서 버티는 이들에게 큰 피해는 주지 못했다. 충분히 비축해 둔 탄약과 군수품은 큰 힘이 됐다. 고도로 훈련된 정예 병력에 약탈과 학살에만 집중했던 민병대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4월 7일 오후 르완다 애국군사령관 폴 카가메 소장이 “국회 밖으로 진출해 학살당하는 주민들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일부 병력은 시내로 진출해 많은 시민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드디어 4월 11일, 4일간의 사투 끝에 투치족 증원부대 3500여 명과 연결작전을 펼치면서 국회 사수작전은 종료됐다.
‘호텔 르완다’의 기적 같은 인명구조
키갈리 시내의 4성급 숙박시설을 갖춘 밀콜린호텔. 이곳이 대학살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지다. 내전 당시 폴 루세사바기나는 이 호텔의 지배인이었다. 키갈리가 무법천지로 변하자 수많은 후투족 온건파와 투치족 피란민이 호텔로 몰려들었다. 지배인 루세사바기나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하지만 뒤쫓아온 민병대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 호텔에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함께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자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정부군 장교들을 설득했다. 비싼 술과 뇌물로 호텔 수색을 막아냈다. 또 시민단체 협조로 호텔이 국제적인 감시망에 노출되도록 했다.
사태가 장기화하자 식수와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임시방편으로 수영장 물을 철저하게 통제하며 급수원으로 사용했다. 루세사바기나와 피란민은 온갖 위협과 고통을 극복하면서 100여 일을 버텼다. 그 결과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1268명의 목숨을 건지는 기적을 낳았다.
광란을 멈춘 ‘르완다 해방의 날’
1994년 7월 4일 아침, 수도 키갈리는 죽음의 광란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카가메 사령관은 후투족 군대의 퇴로를 열어두도록 명령했다. 이들이 도심에서 결사 항전을 벌일 경우 그나마 살아남은 민간인의 추가 피해가 막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매년 7월 4일은 르완다에서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 ‘해방의 날’로 기념한다.
그날의 르완다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을 덧붙여준 친절하고 사려 깊은 안내인 루타간다가 고맙기만 했다. 다음 날은 그의 차량을 이용해 온종일 키갈리 외곽의 대학살 현장을 돌아보기로 약속했다. 사진=필자 제공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