톈산(天山)산맥과 고선지 장군
아버지 고사계 장군 따라 군인 돼
무예 출중 스무 살에 당의 유격장군
4000m 고원 파미르 넘어 서역 정벌
한니발·나폴레옹 업적 넘었다 평가
안녹산 반란 때 모함으로 참형 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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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을 떠난 지 7시간 만에 비행기 아래로 하얗게 펼쳐지는 만년설 톈산산맥을 내려다보며 구보는 한 배달민족 장수를 생각한다. 고구려 유민 출신인 당나라 장군으로, 이곳을 넘나들었던 고선지(高仙芝)였다. 톈산산맥은 3열의 산맥으로 이뤄진 동서 길이 2500㎞, 남북 너비 300㎞ 규모다. 중국 신장과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카자흐스탄에 걸친다. 평균 5000m, 최고 높이는 7435m다. 남쪽의 파미르고원과 이어진다. 가파른 비탈과 깊은 협곡, 분지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고선지의 전장이었다.
고선지의 일대기는 당나라 역사를 수록한 신·구 『당서(唐書)』의 ‘고선지전’과 북송(北宋) 때 『자치통감』에 기록돼 있다. 고선지는 군인이던 고사계의 아들로 랴오닝성에서 태어났다. 고사계는 하서군(河西軍)에 종군했으며, 이후 서역의 쓰전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이민족 출신 군인을 장수로 기용하는 번장제도(藩將制度) 덕이었다. 고선지는 장안에서 서역으로 가는 길목인 량저우(간쑤성 우웨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734년 부친을 따라 지금의 신장성 쿠차로 이동했다. 당나라 서부 방어의 최전선인 안서도호부가 자리한 곳이었다. 변방의 사막지대까지 쫓겨난 망국의 백성이 가난과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려면 군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고선지는 늠름한 자태에 용맹하고, 무예가 출중해 스무 살에 유격장군에 임명된다. 그의 승진은 오롯이 전공으로 이뤄졌다. 741년 톈산산맥 북쪽 돌궐의 한 갈래이던 달해부가 반기를 들자 기병 2000명을 이끌고 가 토벌했다.
이 첫 번째 출정에서 세운 공으로 부도호가 되고, 이어서 도지병마사에 올라 사실상 안서도호부의 2인자가 됐다. 구보는 “선임 안서절도사 부몽영찰이 고선지를 두고 ‘개똥 같은 고구려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구당서의 기록에서 그의 공적이 시기를 받을 정도로 컸음을 짐작한다.
당시 당의 서북쪽 변경 상태는 혼란스러웠다. 남쪽의 투판(티베트)과 서쪽의 이슬람 세력이 동시에 중앙아시아로 팽창하면서 당의 영토로 잠식해 들어오고 있었다. 티베트는 세를 확장하면서 이웃한 20여 부족국을 굴복시키고 있었다. 당 현종은 안서도호부에 제압을 명했지만 부몽영찰 등 절도사들이 연이어 패했다. 티베트군이 강하기도 했지만 당군이 산악 전투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당 현종은 고선지에게 기병과 보병 1만 명을 주며 임시절도사를 맡겼다. 747년 고선지는 파미르를 넘어가 티베트에 복속된 소발률국(카슈미르)을 평정했다. 파미르를 넘은 것은 전쟁사에서도 손꼽히는 장엄한 고산 행군이었다.
파미르는 4000m가 넘는 고원지대로, 히말라야·힌두쿠시·톈산 등 3개의 산맥을 뻗어내며 중앙아시아의 동과 서, 남과 북을 가른다. ‘세계의 지붕’이라 부를 만큼 험난해 영국의 고고학자 오렐 스타인(1862~1943)이 “고선지는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다(『가장 깊은 아시아』)”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특히 만년설이 뒤덮인 힌두쿠시산맥은 그때까지 어떤 당나라 장수도 넘지 못했던 터였다. 고선지가 예상과 달리 그 고개를 넘어 쳐들어오자 소발률국은 바로 백기를 들었다. 고선지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이 원정 이후부터였다. 고선지의 전공에 힘입어 이전에 등을 돌렸던 서역 20여 개국뿐만 아니라 서쪽의 총 72개국이 당을 두려워해 조공을 바치게 됐다. 귀환 후 고선지는 안서절도사로 승진했다. 748년에는 2차 원정에 올라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으로 향했다. 이슬람 세력 진출이 원정의 배경이었다. 750년 고선지는 사마르칸트를 거쳐 북쪽 타슈켄트까지 북상했다. 당시 ‘석국(石國)’으로 부르던 타슈켄트 왕은 항복했으나 고선지는 석국 왕을 장안으로 압송해 참수한다.
이 처형이 훗날 화근이 됐다. 도주한 타슈켄트의 왕자가 여러 이슬람국가에게 공동의 위기임을 고취하며 ‘힘을 합쳐 맞서자’고 선동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의 아바스 왕조가 즉각 나섰고,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부족도 호응했다. 이로써 751년 7월 당나라 군 7만 명과 이슬람 연합군 10만 대군이 지금의 키르기스스탄 북쪽인 탈라스강 유역 하반에서 격돌한다. 이 전투는 『자치통감』에 상세히 전한다. 고선지는 3만 병력을 이끌고 북상해 탈라스에 이르러 진을 치고 대치했는데, 당군의 일부를 구성하던 카를룩 병력이 등을 돌려 이슬람 편으로 돌아서면서 협공당해 참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중앙아시아의 패권이 당나라에서 이슬람으로 이동하게 됐다.
이때 닥나무를 이용해 종이를 만들던 당의 제지(製紙) 기술이 포로들에 의해 이슬람으로 전수되는 문명사적 사건이 수반됐다. 이후 ‘사마르칸트 종이’가 이름을 날리면서 인쇄 문화가 서구로 넘어간다. 이 탈라스전투는 키르기스스탄의 영웅서사시 ‘마나스’ 속에 가상의 민족영웅인 마나스의 승전으로 묘사된다. 구보는 탈라스에서 악기 반주 없이 구체적이고 박진감 있게 구송(口誦)하는 장인의 ‘마나스’를 들으며 고선지가 키르기스스탄에 영웅담 하나를 기증했다고 여긴 바 있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고선지를 중용해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로 전임시키고 대장군에 임명했다. 755년에는 봉작도 내렸다. 그러나 그해 11월 안녹산이 일으킨 반란이 그의 운명을 바꿨다. 고선지는 부원수로 출전했지만 환관 판롱청의 모함에 걸려 란을 평정하지 못한 채 참형을 당함으로써 일세를 마감한다(『당서』). 이 때문에 고선지는 중국 역사에서 ‘억울하게 죽은 장군 열 명’에 포함됐다(『百度』).
고선지의 삶은 드라마였다. 668년 고구려의 패망에서 비롯된 그의 이야기는 신장에서 시작해 파미르 고원과 톈산의 설봉을 넘고, 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분지를 지나 탈라스까지 대장정으로 피어났다. 중앙아시아 어디에서나 조망되는 톈산산맥을 바라보며 구보는 고구려가 내분으로 자멸하지 않았다면 그 공간은 고구려의 기상이 뒤덮었을 수도 있었다고 여긴다. 7세기 말, 고구려 복식의 사절단이 사마르칸트를 방문했음을 보여주는 왕궁 벽화에서도 구보는 같은 인상을 받는다. 그 옛날에 그 먼 공간에까지 고구려의 족적이 찍혔음에 경이로워한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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