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의 문법⑦ 헤레디움, 시간을 복원한 미술관
일제 수탈 이뤄졌던 대전의 건축물
구조적 특징 살린 특별한 전시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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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동구 인동, 주변의 현대식 건물들 사이로 유독 고풍스러운 2층 석조 건축물 하나가 눈에 띈다. 기하학적 문양이 새겨진 정면 상부와 붉은 벽돌, 화강석이 조화를 이루는 외관은 한눈에 보아도 예사롭지 않은 시간의 무게를 품고 있다. 이곳은 1922년 일제강점기에 건립된 구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이다. 식민지 수탈의 최전선에 서 있던 이 건물이 건립 100년 만에 ‘헤레디움(HEREDIUM)’이라는 이름의 복합문화예술 공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동양척식주식회사는 1908년 일본이 설립한 국책회사로, 조선의 토지와 자원을 수탈하는 제국주의 팽창의 도구였다. 당시 9개 지역 지점으로 운영되던 동양척식주식회사는 현재 부산, 목포, 대전지점 세 건물만이 남아 있다. 광복 이후 건물은 미 군정 산하 신한공사, 대전체신국, 대전전신전화국을 거쳐 1984년 민간에 매각되면서 철강회사와 건축자재 판매장으로 쓰였다. 수십 년간 이어진 임의적 개조와 변형으로 원형의 상당 부분을 잃었지만 2004년 9월 국가등록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되며 마침내 보존의 가치를 공인받았다.
‘시간의 레이어’를 쌓다
전환점은 2019년 대전의 향토기업 CNCITY에너지가 건물을 매입한 뒤 문화재로서의 보존과 문화예술공간으로서의 활용을 함께 고민하며 재생사업을 추진했다. 1922년 일본 건축가 오쿠라구미(大倉組)가 설계한 이 건물은 1932년 완공된 충남도청 건물과 함께 당시 대전을 상징하던 신식 건축물로, 철근콘크리트와 붉은 벽돌 그리고 경사지붕으로 구성된 2층 규모의 절충주의 서양식 건축양식이 특징이다.
이상희 목원대학교 교수가 총괄 자문을 맡아 이끈 복원의 원칙은 명확했다. “추정에 의한 복원은 지양하고 건립 당시의 재료와 기술, 장식적 디테일을 최대한 보존한다.” 건립 당시 사용한 타일은 옛 서울역이나 도쿄역과 같은 것으로, 파손이 크지 않으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칸막이벽 안에 봉인된 채 보존돼 있던 2층 목재 창호는 철거 과정에서 발견돼 되살아났다. 원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내부 계단은 증거 없이 재현하는 대신 오브제로 기능하는 나선형 계단을 새롭게 설치했다. 과거를 박제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흔적 위에 새로운 층위를 쌓아 올리는 방식이다. 세월의 때가 묻은 외벽은 과거를 증언하고, 내부로 들어서면 현대적인 공법과 조명을 결합해 전시·공연에 최적화된 세련된 공간이 펼쳐진다. 2022년 12월 준공, 이듬해 3월 가오픈을 거쳐 2023년 9월 8일 헤레디움은 공식 개관했다. 공간의 이름은 라틴어로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를 뜻한다. 아픈 역사를 지운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문화를 덧입히며, 유산의 의미를 미래 세대를 위한 것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현대미술의 진지한 실험장
미술관의 문법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이 ‘시간의 레이어(Layer)’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었던 육중한 건축적 구조가 이제는 국내외 거장들의 파격적인 현대미술을 굳건히 받쳐주는 예술적 캔버스가 됐다. 관람객은 단순히 작품만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과거의 역사적 공간과 동시대 예술이 격렬하게 대화하는 독특한 시공간적 경험을 마주하게 된다.
헤레디움의 전시 프로그램은 개관 첫 전시에서 이미 그 방향을 분명히 했다. 함선재 관장은 “근대적 성격이 강한 이 공간에 현대미술을 더해 시간적 확장을 실천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2023년 첫 현대미술전으로 선택된 것은 독일 작가 안젤름 키퍼의 개인전 ‘Herbst 가을’이었다. 역사의 상흔과 신화, 기억을 거대한 화면 위에 응축시키는 키퍼의 작업 세계는 수탈의 기억을 안고 새롭게 탄생한 헤레디움의 공간적 정체성과 깊이 공명했다.
이후 헤레디움은 데이비드 호크니, 조지 콘도 등을 소개한 현대미술 시리즈와 레이코 이케무라 개인전, 그리고 2026년 초 ‘미완의 지도’까지 국제적 수준의 전시를 이어왔다. 전시마다 역사적 건축물의 구조적 특징을 전시 연출에 끌어들여 과거의 건축 유산과 현재의 예술이 맞물리는 장면을 만들어왔다. 현대미술과 함께 클래식 음악도 헤레디움의 중요한 축이다. 항온항습, 방음, 최첨단 음향·조명 시설을 갖춘 공간은 70여 명 규모의 실내악과 소규모 연주회에 최적화돼 있어 전시와 공연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 쉬는 복합문화예술의 장으로 기능한다.
100년의 세월을 넘어 한불 우정의 예술로
현재 헤레디움에서는 한불 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의 전설적인 컬렉터 이봉 랑베르의 소장품을 국내 최초로 공개하는 ‘이봉 랑베르: 예술가의 곁에서’가 오는 26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봉 랑베르는 1960년대 파리에 첫 번째 갤러리를 연 이후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등 현대미술사의 판도를 바꾼 급진적인 실험을 가장 앞장서서 지지하고 소개해 온 안목의 소유자다. 이번 전시는 그가 50여 년간 구축해 온 방대한 컬렉션 중에서도 현대미술의 마스터피스로 꼽히는 18인 작가의 작품 46점을 엄선해 선보인다. 솔 르윗, 다니엘 뷔랑, 사이 톰블리, 장미셸 바스키아, 낸 골딘,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등 당대 신진 예술가들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하고 지지한 그의 컬렉션은 단순한 작품 수집을 넘어 예술가들과의 긴밀한 협업과 신뢰 속에서 형성된 ‘인간적인 컬렉션’으로 평가받는다.
미술관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어떤 역사적 토대 위에 서 있는가는 그 공간이 생산하는 의미와 깊이 연결된다. 헤레디움은 수탈과 침묵의 시간을 지나온 건물이 어떻게 도시의 문화적 기억을 새로 쓸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대전을 방문한다면, 혹은 그 도시에 산다면 이 오래된 벽돌 건물 앞에 한번은 서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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