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밀수꾼서 안보 흔드는 플랫폼으로

입력 2026. 07. 21   17:47
업데이트 2026. 07. 21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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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그들이 온다
안보프리즘 ‘그림자 선단’의 하이브리드전쟁 


국제 제재 회피 위한 ‘유령 선박’
최근엔 러 원유 수출 유조선 활개
민간 선박 외형에 국적·소유 모호
드론과 연계해 감시·교란 작전도
공해상 경제·군사 인프라 파괴

지난달 14일 영국 해병대가 카메룬 국기를 위장 게양하고 영국해협을 통과하려던 러시아 ‘그림자 선단’ 소속 유조선 스미르토스호를 나포하고 있다. 그림자 선단은 러시아산 원유 밀수에 동원되는 선박으로, 영국이 그림자 선단 소속 유조선을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14일 영국 해병대가 카메룬 국기를 위장 게양하고 영국해협을 통과하려던 러시아 ‘그림자 선단’ 소속 유조선 스미르토스호를 나포하고 있다. 그림자 선단은 러시아산 원유 밀수에 동원되는 선박으로, 영국이 그림자 선단 소속 유조선을 나포한 것은 처음이다. 로이터·연합뉴스


영국 해병대의 러시아 ‘그림자 선단’ 나포

영국 국방부는 지난달 14일 해병 특공대가 카메룬 국적으로 위장한 채 영국 해협을 항해하던 러시아 ‘그림자 선단’ 선박 스미르토스호를 나포했다고 밝혔다. 작전은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헬기에서 야간 투시경과 중무장을 갖춘 특공대원들이 로프를 타고 강하하는 기습 승선으로 시작됐다. 작전은 AW-159 와일드 캣 헬기와 P-8 포세이돈 해상초계기 등 항공기와 해군 함정들의 지원 속에 6시간 동안 진행됐다. 국가범죄청(NCA) 특수 요원들도 함께 승선해 인도 국적의 선장을 체포했다. 24명의 선원은 선박과 함께 억류됐다.

이 선박은 낡은 유조선으로 2025년 7월 국제 제재 대상으로 지정됐다. 하지만 선명을 미르토스(Myrtos)에서 스미르토스(Smyrtos)로 바꾸고 선적도 두 번이나 변경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림자 선단(shadow fleet)’ ‘유령 선단(ghost fleet)’은 국제 제재나 각종 규제를 회피할 목적으로 불법 운용되는 선박이다. 최근에는 제재를 회피하며 러시아산 원유를 수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운용되는 유조선이 주목받고 있다. 이란산 석유가 여전히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도 그림자 선단 때문이다.

그림자 선단은 감시를 따돌리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다. 선박 정보와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끄거나 자신의 위치를 가짜로 송신하기도 하고 가짜 선박번호 사용, 국기를 바꿔 달거나 선박 식별 불능화, 관리가 허술한 국가에 등록하고 불투명한 선박 소유관계 이용, 공해상에서 접선해 화물을 옮겨 싣는 해상 환적 등 다양하다.

문제는 공해상에서 이들을 단속하는 것이 국제법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영국은 그동안 러시아 제재를 위해 미국, 프랑스 등과 협력해 왔지만 군사력을 동원해 그림자 선단을 직접 나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열흘 후인 지난달 23일에는 프랑스 해군도 시칠리아 해안을 지나던 카메룬 선적의 유조선 딜리버호를 나포했다. 프랑스의 그림자 선단 나포는 지난해 8월 이후 네 번째다. 두 사례는 유럽 국가들이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기 위해 사전 조율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 작전 후 배포된 영국 정부의 보도 자료에 따르면 700여 척에 달하는 러시아의 그림자 선단이 국제 제재 대상인 러시아산 원유의 75%를 운송하면서 러시아 경제의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수행 비용을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림자 선단’ 활용한 하이브리드전

그림자 선단은 이제 단순히 제재를 피해 석유를 밀수하는 경제적 수단을 넘어 서방의 안보체계를 흔드는 하이브리드전의 전방위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2024년 말부터 유럽에서 이 선박들이 무기 운반, 해저 케이블 훼손, 드론 정찰, GPS 재밍 등 비군사적 모호성을 기반으로 한 하이브리드전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 사례는 2024년 12월 25일 발트해 핀란드만에서 발생한 해저 전력 케이블 ‘에스트링크 2’ 손상 사건이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를 연결하는 핵심 전력망인 이 케이블이 손상되면서 송전 용량이 급감해 큰 피해가 발생했다. 통신케이블도 여러 개 손상된 것으로 알려졌다. 핀란드 당국은 전력 장애가 발생한 시각에 케이블 위를 지나간 러시아 원유 운반선 ‘이글 S’호가 닻을 끌고 이동하면서 케이블을 훼손한 것으로 보고 선장과 항해사를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공해상에서 발생해 관할권이 없고, 단순한 해상 사고인지, 의도적 파괴인지 가려내기 어렵다며 기각했다.

그림자 선단은 민간 유조선의 외형을 하고 있고 국적과 소유 구조가 여러 나라에 걸쳐 있다 보니 피해국은 대응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는 직접 관여를 부인할 공간을 확보한 것이다. 이것이 하이브리드전의 전형적 방식이다.

이는 물리적 피해를 일으키면서도 책임 소재를 흐리고 상대국에는 불안감을 증폭시킨다. 드론 활동과의 연계 의혹도 주목할 만하다. 최근 영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는 2024년 말부터 2026년 중반까지 유럽 여러 국가에서 144건의 수상한 드론 출현 사례를 분석, 일부 드론 활동이 그림자 선단과 관련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 드론들은 독일, 프랑스, 영국, 덴마크 등에서 주로 군사기지, 핵·에너지 시설, 공항, 항만 주변에 나타났다. 특히 지난해 9월 22일 덴마크 코펜하겐공항에서는 미상의 드론 출현으로 항공기 운항이 중단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주변 해역에는 러시아 그림자 선단으로 의심되는 선박들이 있었다.

드론은 감시와 교란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다. 실제 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공항을 마비시켜 혼란을 초래하고 군의 대응태세를 노출시키며 시민들의 불안감을 조성할 수 있다. 드론 몇 대로 유럽 전체에 심리적 압박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또 그림자 선단은 군함의 출항 주기와 레이다 주파수 정보를 수집해 본국으로 송출하는 기지로 활용되거나, GPS 등 위성 신호를 조작해 해상과 항공 교통 체계를 마비시키기도 하고, 유조선 기름 유출 등 고의적 환경 재앙을 일으켜 사회·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림자 선단은 바다 위 밀수꾼에서 회색지대 안보 위협 플랫폼으로 변모했다.


한반도 주변도 ‘그림자 선단’ 위험 지대

‘그림자 선단’ 문제는 더 이상 먼바다의 이야기가 아니다. 유럽에서 그림자 선단이 해저 케이블 훼손과 드론 정찰 의혹으로 주목받았다면 동북아에서는 북한의 제재 회피 선박, 러시아 극동 항만, 중국 연안 해역이 맞물리며 또 다른 형태의 회색지대 위협이 부상하고 있다. 뚜렷한 사례는 북한의 불법 해상 환적이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 제재로 정제유 수입과 석탄·광물 수출이 제한돼 있지만 이를 회피하기 위해 선박 간 환적, 선박자동식별장치 차단, 선박명 변경, 허위 국적 사용 같은 방식을 지속적으로 활용해 왔다.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북한이 정제유와 석탄·금속광물 관련 제재를 회피하기 위해 그림자 선단을 운용하고 있으며 공해상 선박 간 환적을 통해 석유를 북한 선박으로 옮긴다고 지적했다. 특히 러시아와의 밀착 이후에는 위험이 더 커졌다. 2024년 3월부터 러시아 극동 보스토치니 항에서 북한 유조선들이 정제유를 실어 간 정황이 위성사진과 항적 자료로 포착됐다. 로이터는 북한이 8개월 동안 러시아에서 유엔이 정한 연간 정제유 수입 상한인 50만 배럴의 2배인 100만 배럴을 가져갔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극동의 보스토치니·나홋카·블라디보스토크 일대, 북한의 나진·청진·남포, 중국 산둥반도와 저장성 앞바다, 동중국해와 서해 북부 해역은 모두 그림자 선단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우리에 대한 위협은 심각하다. 북한이 연료와 외화를 확보하면 미사일 발사체 운용, 군수공장 가동 능력이 유지되며 이는 군사적으로 큰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정보·정찰 위험도 크다. 민간 상선으로 위장한 선박이 항만, 해저 케이블, 에너지 시설, 군사기지 주변을 반복적으로 항해하며, 정찰과 교란 임무를 수행하면 안보·경제·사회적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해군, 해양경찰, 관세청, 외교부, 정보기관이 공유하는 ‘의심 선박 통합 감시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또한 여러 국가의 항만, 금융, 보험, 선박등록 정보를 활용하기 위한 국제 협력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군사 안보는 물론 해양 정보전과 경제안보, 환경안보까지 결합한 통합 대응체계 수립이 시급하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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